꿈, 환상, 때로는 착각
시간이 지나면 모든 기억은 미화된다.
그땐 그랬지,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랬지, 이유를 찾고 결론을 내려 예쁘게 포장한다.
사람은 그래야만 살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나도 H, W와 함께 일했던 그 기괴한 경험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 TFT라 여건이 그랬었다,
예쁘게 포장해서 기억 속에 묻었다.
팀이 해체되고 나는 본부의 다른 팀으로 옮겨갔다.
이 팀도 쉬운 팀은 아니었다.
회사 사업의 중요 데이터를 관리하는 부서라 팀 규모가 컸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곳이었다.
나는 예전 속담 며느리의 덕목 '벙어리 3년, 장님 3년, 귀머거리 3년'을 실천하며
팀에 나름 적응해 잘 지내고 있었다.
승진도 했다.
브랜치에 계속 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승진했다는 소식은 H와 W의 귀에도 들어갔다.
오랜만에 H, W, K와 내가 들어있는 단톡방에 H가 톡을 남겼다.
승진 축하 파티를 하자는 것이었다.
H: 장소는 000이고 수요일 7시에 예약했어요~
000이라고? 장난해?
그곳은 H와 W의 집 근처였고, 사택에서 생활하는 나와 K에게는 상당히 먼 곳이었다.
게다가...
나: 죄송한데 수요일에 우리 팀 회식이어요.
H: 늦게까지 있을 테니까 회식 끝나고 들려요
나: 회식 끝나고 들리기에는 거리가 넘 멀어요.
날짜를 바꾸던가 아님 장소를 본부 근처로 하시면 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H: 아녜요 이팀장. 회식 끝나고 들려요. 기다릴게요.
나: 네???
결국 내 승진을 축하하는 파티는 나 없이 시작되고 끝났다.
진짜 내 승진을 축하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난 축하자리를 만들었다. 네가 오지 않았을 뿐'
하는 증거? 면피?를 위한 자리였을 뿐이었다.
팀이 해체되고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본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A특화 브랜치를 강하게 드라이브했던 회장은 횡령에 대한 투서가 들어와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꽤 오래 비어있었던 회장자리에 새로운 인물이 낙점되었다.
새 회장은 오자마자 그동안 미루어놓았던 인사를 단행하고 본부의 조직개편을 시작했다.
새 회장 L은 본인과 학연이 얽힌 J를 가장 가까운 자리인 기획국장에 발탁했는데
조직을 아직 잘 모르니 모든 인사는 J와 상의해서 결정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새 회장, J와 같은 학교 출신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회장을 찾아가 선배님 반갑습니다~하고 인사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농담이겠거니...하고 넘겼다.
조직개편에는 역시 고통이 따랐다.
통합되는 팀, 없어지는 팀, 새로 생기는 팀, 그에 따른 인사.
본부가 몸살을 앓는 중, 누군가 나에게 H가 본부에 와서 회장을 만났다 얘기해 줬다.
그 이후, 조직개편으로 새로 생기는 부설기관에 H가 올 것 같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팀의 M이 나에게 H에게서 연락이 없었냐 물었다.
본부에서는 누가 H의 연락을 받았다, 부설기관에 누구누구가 합류한다 소문이 도는 중이었다.
H의 연락을 받으면 '능력자로 뽑힌 사람'이라는 분위기였다.
M: 연락 못 받으셨어요? 새로 팀 꾸리려면 같이 일했던 검증된 사람들 다시 모으려 하잖아요.
팀장님은 여기보다는 부설기관 가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거기가 전문직 중심이나까... 연구개발 쪽이 더 맞으시잖아요.
나: 그런가요? ㅎㅎㅎ 저한테는 연락 없었어요. 아마 연락 안 할 거예요.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K는 연락을 받았고 합류하기로 했다고 했다.
나에게는 연락 안 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내심 섭섭하기도 했다.
왜?
예전의 H과 함께 일했던 기억은 미화되었고,
뼈 빠지게 일했는데 내 노력이 잊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운동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데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H였다.
잠시 화면을 아무생각없이 들여다 봤다.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누르는 찰나 스치고 지나간 생각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내가 내 발등을 찧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