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하겠어 일을 한 거지

의심할 줄 모르는 선량한 사람이 조직에서 당하는 일

by 닥터맥리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해 먹는 인간들을 조직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사람은 도구나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타인을 본인의 목적달성을 위해 이용할 권리는 없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이용당하고 있는 줄.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사업이 재검토에 들어가자 팀원들은 걱정이 많아졌다.

만약 사업이 백지화되고 팀이 해체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H와 W는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 날, H가 나를 불렀다.


H: 내가 얼마 전에 N브랜치 지사장을 만났는데 말이야

그 지사장이 S나 L 같은 대기업 임원 지내고 퇴직한 사람들 특별채용해서

대관 업무나 대외협력 업무에 활용하는 거 어떠냐고 하더라고.

그런 특별채용 관련해서 계획안 부탁해요.


순간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N지사장이 특별채용에 관심이 있으면 있는 거지, 그걸 본부 부서가 왜 계획을 세우나?

만약 특별채용을 실행하게 되면 우리 회사가 얻는 이득은 뭔가?


H: 대기업 임원 출신들 우리 회사에 오면 그 사람들 대관이나 대외협력에 최적화된 사람들인데

우리 회사는 그런 게 좀 약하잖아. 그러니까 필요하지.

나: 네... 그건 알겠는데 대기업 임원 지낸 분들이 우리 회사에 올까요?

연봉이나 여러 가지 조건이 안 맞을 텐데요

H: N지사장이 그런 사람들 많이 아는데 오고 싶은 사람들 많데.

그 사람들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니고 명예나 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이잖아.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좀 해봐 봐.


회사의 정관이나 내규를 아무리 검토를 해도

H가 말하는 특별채용을 뒷받침할만한 내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형태의 비공개 채용을 제한하는 내용이 많았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노조가 또 들고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 정관이랑 내규가 그런 형태의 채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요.

채용은 안 그래도 민감한 문제인데 나중에 문제 될 수도 있어요.

H: 정관이나 내규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해 봐요.

정관, 내규는 나중에 개정해도 되고, 정 안되면 규칙으로 해도 되니까

나: (헐~ 겪으면 겪을수록 신박한 인간일세)


나는 온 힘을 다해 정관과 내규를 쥐어짜고 샅샅이 뒤져서

그놈의 특별채용이 새끼발톱 끝을 갖다 댈 수 있을만한 작은 틈을 겨우 찾아냈고

그걸 근거 삼아 특별채용 계획안을 작성했다.


H는 그 계획안을 들고 N지사장을 만나러 가자했다.

응? 맨날 지가 혼자 들고 가 보고하던 인간이 왜 같이 가자는 거지?

N브랜치는 본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지사장실에 들어가자 H는 나에게 계획안에 대해서 브리핑하라 했다.

응응?? 맨날 세상 겸손한 척, 똑똑한척하며 브리핑을 즐겨할 때는 언제고

이번엔 왜 나한테 하라는 거지???


H: 이팀장이 준비한 건데, 본인이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언제는 내가 준비 안 했었나. 항상 지가 해놓고.

뭔가 이상했지만 블라블라블라 브리핑을 마쳤다.

지사장: 지난번에 내가 얘기한 걸 기억하고 이런 걸 다 준비하셨군요.

허허허 수고하셨습니다. 계획안은 졔가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볼게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해서... 다음에 또 뵈어요


응응응???

계획안에 대해서 더 디테일한 논의가 오가야 하는 것 아닌가?

또 뭔가 이상했다.


이후 N지사장은 연락이 없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노조와 본부, C브랜치가 논의한 끝에

A특화 브랜치 설립 사업은 C브랜치와 본부의 다른 부서가 주도해서 진행하고

우리 팀은 해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팀원들은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운명이었다.


나와 K는 본부에 남기로 했다.

그 선택도 쉬운 게 아니었다.

W는 본부생활을 접고 브랜치로 가기로 했고,

J는 원소속 브랜치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H는?


그는 원 소속 브랜치를 떠나 본부와 길 하나 사이에 둔 N브랜치로 이동했다.

그가 나에게 준비하라 했던 특별채용 계획안은

N브랜치로의 이동을 위해 지사장에게 잘 보이려는 포석이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이번에도 그는 '진짜로 실행할 계획'이 아니라 지사장의 관심을 끌려는 '문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브리핑을 나에게 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내가 찾아낸 정관과 내규의 틈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 혹시라도 생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더 나은 조직을 위해 '일'을 한 줄 알았는데

그가 원하는 브랜치로 가기 위한 길을 닦아주고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을 이용하며 평생을 살아온 인간들은

거기에 최적화된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의 뒷면을 알아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실력으로 평가받으려는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은 의심할 줄 모르며, 다른 사람들도 다 나와 같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뭔가 쎄----함을 느끼면서도 '설마'가 사람을 여럿 잡을 때까지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가면에 당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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