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쉬운 설득은 설득이 아니었음을

같은 말을 듣고 다른 결론을 내리는 사람

by 닥터맥리


주변에 이런 사람 무조건 있다.

같은 말을 듣고도 혼자 다른 결론을 내리는 사람.

만약 팀의 리더가 이런 사람이라면 어떨까?


설득이라 함은 자신의 논리를 충분히 설명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나의 의견에 동의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 '설득'을 전혀 다른 의미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우리 팀이 탄생한 목적, 기존 브랜치를 정리하고 A특화 브랜치를 만드는 일에는 고통이 따랐다.

어느 브랜치를 개편하느냐가 관건이었는데 두 가지 안이 대립했다.

1. A를 이미 진행하고 있는 브랜치(B라 하겠다)에 A관련 사업을 강화하자.

2.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 새로 브랜치를 삐까번쩍하게 하나 만들자. 그까이꺼.


B를 강화하는 것은 다른 브랜치들이 반대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한국사람들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B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고, 사업이 고도화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는 거다.


그리고 B는 입지가 안 좋았다. A라는 산업과 연결되기가 어려웠다.

가장 치명적인 건 맨파워였다.

B의 구성원들은 딱 두 패로 갈렸다.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파는 당연히 있는 거고, 반대하는 파도 있었다.

걍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살고 싶은데 예산이 투입되고 할 일이 많아지는 걸 싫어하는 파.


새로 브랜치를 설립하는 것은 아시다시피 엄청난 예산이 필요하다.

그 예산을 끌어오는 건 로또를 맞아도 불가능했다.

예산보다 더 중요한 건 '시간'이었다.

부지선정하고, 매입하고, 건물 올리고... 하세월이다.

현 회장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데, 있는 동안 뭔가 성과가 나오기 어렵단 얘기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에 갔던 H가 또(!)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하---- 이번엔 몇 시간짜리인가?

의자 방향을 슬슬 돌리며 H와 W의 환장의 짝꿍쇼를 관람할 준비를 하는데

H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H: 회장님이 C브랜치에 하라는데???


엥?? 이건 또 뭔 X 같은 소리인가?

(내가 이 정도면 W는 뒤집어지는 거다)


W: 네??? 왜요? 이유가 뭐래요? B브랜치가 제일 현실적인걸 아시는데도 그래요?


이미 언급했듯이 B의 약점은 입지였는데 C는 B보다 더 안 좋았다.

조직은 논리나 효율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위에서 하라면 해야 한다.

그것도 최상층에서 내리는 오더라면 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결국 C로 결론이 하루아침에 나고, 개편작업이 시작되었다.

C는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다.

H는 C의 구성원을 대상으로 사업설명회 비슷한 것을 진행했다.

사업의 목표, 계획, 그리고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긍정적인 결과까지.

정리되어야 하는 사업의 팀원은 원하는 브랜치로 이동까지 보장한다고도 했다.


H: 상황종료지 뭐. 다들 내 얘기에 설득됐지.

처음엔 분위기 싸 했는데 끝나고는 다 동의하더라고.


응? 이렇게 쉽게 해결된다고?

좀 찜찜했지만 진심으로 호소해서 잘 설득됐나 보다 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본부에 우리 팀과 H에 대한 투서와 민원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노조는 C의 A특화 브랜치로의 개편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본부 앞에는 우리 팀을 즉각 해체하고 사업을 중단하라는 1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아니, 다 설득됐다며.

빗발치는 항의전화와 민원에 대응하는 건 고스란히 나와 K의 몫이었다.

W는 H옆에 딱 달라붙어 그의 심기를 경호하며 대응업무에서 열외 되었다.

햐~ 역시 기회주의자는 다르다. 위치선정이 예술이다.


반대여론이 들끓자 다급해진 H는 반대의 핵심인 ### 팀장을 만나러 갔다.

아침에 내려간 H는 퇴근 때가 다 되어 복귀했다.


H: ### 사무실에서 한 네 시간 얘기한 것 같아.

처음엔 내 얼굴도 안 쳐다보다가 결국 설득됐지.

나랑 우리 팀을 응원한데.


아, 다행이다.

사업이 끊기지 않고 진행되겠구나 하는 생각보다도

내일부턴 민원에, 투서에 대응할 일이 없어지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다음날, 1인 시위는 종료되었겠군 하며 본부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H가 설득했다던 ### 팀장이 우리 팀을 해체하고 사업을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보란 듯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H에게 설득은 대부분의 상식이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설득'이라는 개념과 다르구나.

그에게 설득은 상대방의 입장이나 태도를 바꾸는 게 아니라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줄창해서 상대방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구나.

질려버린 상대는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그냥 네네 알겠습니다 하고 넘어가지만

생각은 1도 변하지 않고 더 심하게 반대하게 된다.

조직이 아무리 상명하복이 기본 개념이라지만

반대여론이 심하면 사업진행의 동력은 약해진다.

명령을 내려보낸 최상층도 극심한 반대를 뚫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결국, 사업을 재검토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나는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H의 마음이 어떨까

조금 안쓰럽다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이 마음을 싹 다 뒤집는 일이 또 벌어지게 되는데...


하, 정말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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