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 사회자, 그리고 박수부대
나는 회식을 싫어한다.
내 또래, 그보다 젊은 직장인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안 그래도 싫은 회식이 더 싫어지는 계기가 있었으니...
어느 날 H가 회식을 하자했다.
소문자 i인 나는 해지고 난 후 집 밖에 있는 건 거의 노동이다.
너----무 싫었지만 J와 K가 "같이 밥 먹으며 우리끼리 얘기 좀 하자"라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H는 본부 연구소 소장을 회식에 초대했다 했다.
엥? 팀 회식에 다른 팀, 그것도 부서장을 초대했다고???
연구소장은 본부 내에서 일을 요리조리 피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핵심적인 사업에서는 그는 필연적으로 열외였다.
H의 입장에서 친해봤자 얻을게 하나도 없는 사람.
그런데, 머릿속에 거대 계산기를 장착하고 있는 H가 연구소장을 초대했다고?
정말? 응? 왜???
나중에 알게 된 이유가 참 H다웠다.
우리 팀은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진 팀이라 예산이 없었고 법인카드도 한 장이 없었다.
연구소장을 초대한 이유는 그 팀 법인카드로 회식비를 긁으라는 의미였다.
하 신박한 인간. 하여간 사람 이용해 먹는 덴 도가 텄네 텄어.
본부에서 택시를 타고 회식장소로 이동했다.
허름하고 비위생적이어서 여기서 뭐 먹었다간 바로 식중독 걸릴 것 같은 느낌의 식당이었다.
상이 차려지고 H가 거들먹거리며 회식의 시작을 선포?? 했다.
이때부터 정말 듣도보도 못 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편으론 흥미롭기까지 했다.
H는 회식의 진행자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회식 참석자의 발언 순서, 발언 내용을 통제했다.
H: 자, 이번에는 우리 고민 많은 이팀장, 오늘 회식에 와주신 소장님께 감사 말씀 드리세요
나: (네???? 내가 왜요?? 난 회식하기 싫었는데요???)
물어서는 안 될 것을 서슴없이 공개적으로 묻기도 했다.
H: K는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여자친구는 있나?
그가 발언권을 주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하면 바로 제지당했다.
그가 요구한 것과 다른 내용의 발언도 마찬가지로 제지당했다.
이런 진행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초대된 연구소장에게도 마찬가지였다.
H: 소장님 우리 팀 정말 고생이 많지 않습니까? 노고를 치하해 주세요.
(정말 '노고'와 '치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런 단어를 구어체에 쓰나???)
소장: (노고 치하가 아닌 다른 얘기 블라 블라)
H: 아니 그 얘기 말고 노고를 치하해 달라니까요
결국 소장은 관심도 없는 남의 팀 노고를 아주 형식적으로 ‘치하’해야만 했다.
이렇다 보니 회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H의 입만 쳐다봤다.
우리끼리 얘기 좀 하자던 나와 J, K의 계획은 물 건너갔다.
처음에는 그가 회식의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수고를 자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보통 회식에서는 조직의 위계가 느슨해진다.
그래서 서무실에서는 하지 못했던 얘기를 한다.
상사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
팀원들끼리 속내 털어놓기,
(상사가 간 이후에는) 상사 뒷담화 등등
그는 그걸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회식에서 오고 가는 '말'까지 통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더 견디기 어려운 건 회식 내내 이어지는 H의 본인 자랑이었다.
다른 사람의 발언을 통제하면서 본인 자랑으로 얘기가 연결되게 만들었다.
'내가 S에 근무할 때 말이야', '내가 미국에 주재원으로 있었을 때 말이야',
'내가 전 직장에서 최연소 상무였는데 말이야'...
나중에는 가족 자랑을 통한, 듣고 보면 본인의 자랑까지 이어졌다.
와이프가 승진해서 BMW를 사줬다,
아들이 지방에 의대에 진학해서 학교 근처에 신축 오피스텔을 사줬다
시작은 '와이프의 승진'과 '아들의 의대진학'이지만
마무리는 본인의 재력에 대한 과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H 영혼의 단짝, W가 있었다.
W: 어머어머 그거 되게 비쌀 텐데,
와, 팀장님 집안이 아주 좋으시네요~~~
정말 사모님 너무 좋으시겠다~
(흐미 난 저 사람 와이프로 단 하루도 못 살 것 같은데)
W도 참 대단한 인간이다.
맞장구도 저 정도면 예술의 경지다.
공식적인 자리뿐만 아니라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그리고 거기에 적절한 감탄과 찬사로 맞장구치는 사람.
이 두 인간의 콜라보는 팀워크를 다지는 회식을 그냥 빨리 탈출하고 싶은 자리로 만든다.
그래, 내가 저런 장단에 맞장구를 못 쳐서 출세를 못하는 거지.
본부에서 이런 사람들과 일하게 된 내 처지를 '똥 밟았다'가 아니라
권력 휘두르기를 즐기는 상사와 그 옆의 맞장구러를 가까이서 관찰하는 기회를 잡았다 생각하자.
(이렇게 또 정신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