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죄책감을 심었다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당해본 적이 있는 일인 것 같은데
'기시감'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회의실로 나를 부른 상사는 낮은 목소리로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ㅇㅇㅇ 팀장, 너무 아프게 듣지 마요.
다른 사람들이 ㅇㅇㅇ 팀장이랑 일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난리예요.
그거 막느라고 나도 힘들어.
이러면 내가 조직을 어떻게 관리하겠어요?"
이게 대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내 별명은 '적 없는 ㅇ팀장'이다.
다른 팀 팀장이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자긴 사방이 적인데 어쩜 그렇게 두루두루 잘 지내냐며 지어주었다.
그런데 나랑 일하는 게 힘들다고 아우성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누가 나랑 일하는 게 힘드시데요?
뭐 때문에 힘드실까?
누군지는 빼고 뭐 때문에 그러는지 대충이라도 얘기해 주세요. 고칠게요."
상사는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얘기로 넘어간다.
"ㅇㅇㅇ 팀장이 일을 안 해서 내가 그 일 다 했잖아."
이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우리 팀에서 사람이 한 명 빠지면서 그 사람 업무까지 내가 다 하는 통에
손목 터널 증후군까지 와서 뼈주사 맞아가며 일하는 중인데.
무엇보다도 이 상사는 내가 일을 안 했다고 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조용히 본인이 할 사람이 아니다.
이번에도 궁금한 진심을 담아 질문했다.
"어머나 제가 무슨 일을 안 했을까요?"
상사는 이번에도 구체적인 대답은 하지 않고 다른 얘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일찍 일찍 출근하고
내가 요즘 보니까 ㅇㅇㅇ 팀장 근태가 안 좋아"
개 풀 뜯어먹는 소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이쯤 되면 지친다.
나는 9시 30분 출근, 6시 30분 퇴근 유연근무를 활용하고 있고
9시 20분이면 사무실에 도착한다.
내 근태가 문제라고 생각했으면 처음부터 그 얘기를 하면 될 걸
'다른 사람들'이 나랑 일하는 걸 힘들어하네,
네가 일을 안 해서 '내'가 했네,
이런 소리는 왜 하는 거냐고.
쎄----하다.
"저는 (내 유연근무 설명, 사무실 도착시간 설명) ~~~ 인데
그럼 유연근무를 하지 말란 말씀이세요?"
상사는 "내가 유연근무 하지 말라고는 말 못 하잖아"
오- 처음으로 맞는 말을 했다.
유연근무는 내가 속한 조직 직원의 권리이다.
누가 해라 마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ㅇㅇㅇ 팀장이 늦게 오면 다른 사람들이 '어? ㅇㅇㅇ 팀장은 늦게 출근하네?
나도 늦게 출근해야지'하고 다들 늦게 오면 내가 조직관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이쯤 되면 이건 개 풀 뜯어먹는 소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의 수준을 넘어
'호환 마마'보다도 무섭다는 갑질의 영역이다.
정리하자면 상사는 내가 유연근무를 하는 게 못마땅했고
유연근무를 하지 말라고는 말 못 하니
'다른 사람들'이 너랑 일하는 걸 힘들어하네,
네가 일을 안 해서 '내'가 했네를 시전해
내 죄책감을 건드려 판단력을 흐리게 함으로써 본인의 말을 듣게 하는
가스라이팅*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명령하지 않았다.
대신 죄책감을 심었다.
증거를 대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들’을 들이댔다.
뜻대로의 반응이 나오지 않자,
나를 문제 삼았다.
하...... 맞네 맞아.
이 인간 이거 소시오패스네.
* 가스라이팅은 상대의 기억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기술이다.
나는 그날, '적 없는 ㅇ팀장'보다 상사의 낮은 목소리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