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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이 Sep 03. 2019

죽음을 의식하며 확인하는 것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된다는 섬뜩한 명제를 접했을 때

다시 말해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내 나이 7살이었다.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집안의 어둠을 몰아내는 아침이면 7살 꼬맹이는 어머니와 아버지 틈에서 제일 먼저 눈을 떠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무언가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어머니의 ‘숨’이었다. 잠들어 계신 부모님의 곁에 조용히 다가가 코에 검지 손가락을 가로로 대어보고,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했다. 그리곤 규칙적인 콧바람이 나의 검지 손가락을 스치면 그제야 비로소 안심 한 채로 모두가 잠든 이른 아침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다시 잠들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부모님이 당장 내일이라도 돌아가시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나이가 들어 노화가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신체적 변화들이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 변화들이 짙어지고 선명해질수록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라 여겼는데, 대상을 떠올려보자면 할아버지나 할머니들로 모두 세월이 건네주는 고약한 신체적 변화들을 감내하고 계신 분들이다. 그런데 나의 부모님들은 당시에 오랫동안 가정을 이끌어 오시면서 장기간의 걸친 육체노동과 세월의 무게가 누적돼 찾아오는 아픔에 신음했으며, 고된 노동 강도를 맨몸으로 견뎌내며 살아오신 탓에, 또래 친구들의 부모님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러한 사실 때문에 무서웠다.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을 보기 위해서는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전부가 되는 순간이 당장이라도 찾아올까봐서.



어린 시절의 나는 평생을 살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과학자를 꿈꿨다.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일기장엔 앞뒤 맥락 없이 ‘맨날 맨날 살 수 있는 약을 만드는 과학자 되기’라고 적혀있다. 조급했던 마음이 떠오른다. 내가 과학자가 되려면 몇 십 년 후에나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늦어도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부모님이 평생을 살게 되면 반복되는 일상에 위태롭게 서있는 당신들도 분명 행복한 일상을 마주하는 횟수가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반복되는 일상을 멈출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왜 멈출 수 없는 건지는 몰랐던 시절에,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면 삶의 빈틈 사이사이에 행복한 순간을 우겨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멈추지 않는 시간에 야속해하며 조급한 마음만 키웠던 어린 시절의 나는 활동량도 많고 호기심도 넘쳤던 나이의 특수성 탓에 자극적인 게임과 친구들과의 놀이에 사로잡혀 다른 곳에 에너지를 집중했고, 이내 죽음의 존재를 망각한 채,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순박함이 자리했던 곳에 성숙함과 지식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그런 탓인지 평생을 사는 약을 만들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은 꾸지 않는다. 지금은 평생을 사는 약을 만들겠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멈췄고, 부모님이 내일이라도 당장 돌아가시지는 않을까 하여 매일 아침을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여전히 나에게 무서운 존재다. 사랑하는 가족, 함께 성장하며 의지해온 친구들, 나에게 소중한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 평생을 그리워해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만을 남기는 죽음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내겐 무서운 존재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의 두드러지는 차이 하나가 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매일 아침 부모님의 ‘숨’을 확인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의 내가 매일 확인 하는 것은 더 이상 ‘숨’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사하는 모습, TV를 바라볼 때 짓고 계시는 표정, 주름과 검버섯 사이사이에 스며든 지난한 삶의 과정과 힘겨운 투쟁, 매일 챙겨 드시는 약의 종류와 개수,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부모님의 옷가지들, 단 한 번도 자세히 바라본 적 없었던 출근길의 뒷모습, 함께 가보지 못했던 여행 장소, 나의 컨디션에 따라 내뱉는 차가운 말들에 송곳은 없었는지 등을 확인한다. 다시 말해 그들을 조금 더 오래, 주의 깊게, 의식하며 바라보는 게 내가 확인 하는 것들의 전부다.    


어린 시절의 내가 불로장생의 약을 선물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의 나 또한 대단한 행복을 안겨드리지 못한다. 다만 지금의 나는 죽음이 내게 안겨줄 슬픈 그리움을 추억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더는 회상의 단편 속의 적막하고 쓸쓸한 배경에 부모님이 외로이 남겨져 있는 모습으로 각인되어 슬퍼하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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