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에살다 Jan 05. 2021

파피루스와 천막

과학사로 보는 바울서신의 경제학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은 비즈니스맨이자 커뮤니케이터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천막을 제작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다소는 목축지뿐 아니라 천막 제작으로도 유명합니다. 바울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천막 제작 과정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 제작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며 복음 전파 활동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열정적인 커뮤니케이터였습니다. 자신이 직접 썼든, 제자들이 썼든 간에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쓰인 편지는 신약성경 27 중 무려 13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수차례 전도여행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릴뿐더러 영감 어리고 치열한 집필을 통해 복음과 신앙을 나누었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편지 로마서

바울 서신 중 로마서가 가장 깁니다. 로마제국 5대 도시 중 하나인 고린도에서 바울은 갈대로 만든 펜을 들고 당시에 귀한 잉크를 찍어 파피루스지에 복음과 신앙을 치열하게 적어 내려갔습니다. 로마서에 쓰인 단어는 무려 7,114개입니다. 오늘날 얇은 문고판 서적이나 소책자 정도의 분량이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엄청난 분량의 편지였습니다. 로마시대 편지는 오늘날 SNS에 올리는 글과 비슷합니다. 평균적으로 90개 정도 단어 분량으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평균적으로 995개 단어로 쓰인 명문장가 세네카의 편지에 비해 7,114개 단어가 쓰인 로마서는 대단한 분량의 편지였습니다.



로마 시대에 출간되어 오랜 기간 동안 유럽에 영향에 미친 책 중 하나가 기원후 77년에 출간된 <박물지>입니다. 로마의 해군 대장군이자 박물학자였던 플리니우스가 100여 가지 출전을 바탕으로 당시 자연과학지식을 모았습니다. 중세 유럽까지 영향을 미쳤던 <박물지>는 내용뿐 아니라 양도 방대합니다. 37권의 두루마리에 걸쳐 플리니우스는 천문학, 역학, 생물학, 지리학 등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플리니우스가 이 방대한 저서를 남길 수 있는 이유로 박물학자로서의 열정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로마 대장군으로 가진 힘과 정보력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재력 또한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로마제국 당시 서적 출간은 개인 재력에 의존했다. <박물지> 저술 및 출간을 위해 플리니우스는 외부로부터 어떤 후원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비를 털어 저술하였고 출간하였습니다.


대부호 플리니우스, 박물지를 쓰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입니다. 플리니우스는 속이 빈 마른 갈대 끝을 만년필 펜촉처럼 만든 갈대 펜을 들었다. 나무 그을음이나 기름의 그을음을 고무액에 섞어 만든 잉크에 펜을 찍어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25센티미터 파피루스지에 글을 적었고 여러 파피루스지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를 만들었다. 플리니우스가 <박물지>를 적은  파피루스지는 고급 중에 고급인 히에라티카급으로, 고대 하이집트 전역에서 재배된 파피루스로 만들었습니다. 로마 제국 당시 파피루스지는 전량 이집트에서부터 들어왔으며 문서작성을 위한 고급용지인 히에라티카급에서부터 상품 포장을 위한 거친 엠포레티카급까지 9종류 파피루스지가 있었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파피루스 가격은 양피지보다 쌌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갈대나 대나무로 만든 갈대 펜과 오징어 먹물이나 그을음을 고무액과 섞어 만든 잉크 역시 값비싼 문방구였습니다. 이러니 로마 시대 책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피루스 두루마리 1권의 책 가격은 당시 노동자 하루 임금의 5만 배였다고 하니,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말 그대로 고가의 재산이었습니다. 금고 같은 안정장치가 달린 곳에 보관하였다가 특별한에 꺼내어 보여주거나 읽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보면, 로마 시대 편지들이 왜 그리 짧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쓰는 데에 고가 비용이 들기 때문입니다. 파피루스보다 쌌던 나무껍질을 얇게 저민 나무지 역시 결코 저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편지에 할 말만 적었습니다. 오늘날 SNS 글과 비슷합니다. 신약성경에 실린 편지가 사도 바울이 쓴 편지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교회와 지도자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편지를 통해 그는 복음을 알리며 교회를 격려하며 교회 문제에 대한 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여러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파피루스, 갈대 펜, 잉크 구입비는 상당한 재력을 요구합니다. 중고 파피루스지를 사용했다 해도 그렇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오래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물에 씻어 깨끗하게 빨아서 다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사도 바울은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충당했을까요? 빌립보 교회 외에는 정기적 혹은 연속적인 후원이 거의 없었기에 그는 가죽을 만지는 그러나 아주 익숙한 천막 제작을 했습니다. 그에 대해 험담을 쏟아냈던 많은 대적자들은 사도 바울이 교회 후원을 받지 않고 천한 노동을 한다고 조롱했습니다.


사도 바울, 천막을 만들다

사도 바울 당시 천막은  상당한 비용을 치러야 구입할 수 있는 값비싼 제품이었습니다. 바울의 고향 다소에서는 여러 유목민들이 염소 털이나 다양한 천을 이용하여 집에서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염소털 천막 하나를 만드는 데 80마리 정도 염소로부터 얻은 털가죽이 필요했습니다. 가죽량이 상당하니 천막 제작 시간도 오래 걸렸습니다. 수 백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기에 천막 제작은 결코 혼자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로 대도시에서 활동했기에, 유목민용 천막보다는 도시용 천막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원형경기장 천막, 신전 축제용 천막, 군용 천막 등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도시용, 군용 천막을 제작하여 납품하기 위해 천막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갔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도시의 공공행사나 여러 로마 군부대에 천막을 조달하는 업무를 맡아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을 만들며 번 수익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며, 여행을 하며, 먹고 마시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비용을 천막 제작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편지 쓰기를 위한 비용 역시 천막 제작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 수익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일정 품질 이상의 파피루스, 잉크와 갈대 펜을 구입하여 노동이 멈춘 시간에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천막 제작을 선교사역을 위한 생계유지 방편으로만 보지 않게 합니다. 그의 천막은 로마 대도시로 파고들어 사람을 사귀고,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는 겸손한 삶을 배우게 할뿐더러, 진실한 신앙 고백이 고스란히 담긴 영감 어린 편지를 쓰게 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