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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6. 자살은 매일 해야 하는 거요

- 김언희 시집, 《호랑말코》

by 김정수

P46. 자살은 매일 해야 하는 거요 - 김언희 시집, 《호랑말코》(문학과지성 시인선 610, 문학과지성사)

아,

놀랐습니다.

자살은 매일 해야 하는 거요’라는

무서운 선언이

시인의 입에서 나올 줄은

예,

몰랐습니다.

심지어

한 번으로는 부족한 날도 있소’라니요?

하지만

생각 좀

해보세요.

자살을 날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요.

게다가

한 번으로 부족한 날’도 있다니,

그럼

할 수만 있다면

하루에

몇 번씩이라도

하라는 거잖아요?

아,

도대체

어쩌자는 걸까요?

심지어 시인은

자살을 부추기다 못해

죽은 뒷날에는 개운하게 깨어납시다’라며

독려까지

하고 있네요.

개운하게 깨어날 수 있으니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걸까요?

아,

아직도 안심하기엔

이릅니다.

시인은

힐난하듯 일갈합니다.

웃기지마한번만으로죽으면되는죽음같은건없어’라고요.

띄어쓰기조차 무시하면서

가차 없이

경고하네요.

한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아닙니까.

한데, 시인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침내는 이렇게

장담까지 합니다.

죽어봐서알아내가’라고요.

그렇군요.

시인은

이미 스스로

죽어본(!) 것입니다.

그러니 시인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해야겠지요?

임사체험 따위가

아닌 거예요.

그런

유경험자가

하는 말이니,

우선은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잖아요?

이제 궁금합니다.

시인이 이러는 까닭이

도대체

뭘까요?

저는

다음과 같은 시인의 고백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우린저마다신이야자기자신이라는신우릴건드릴수있는건아무것도없어’라는

고백이요.

스스로 신이라는

도저한

고백이라니!

물론,

우리가 저마다

신이라는 말은

천도교 교리서에도

나온다고 하지요?

예,

그 스스로가 신이므로

기도도

그 스스로를 향해서

하는 게

마땅하겠지요.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나는나를위해나에게기도해’라고요.

그래도 시인은

신은 죽었다고 했던

철학자

니체와는 달리,

신은 망했다고 했던

시인

이갑수와는 달리

최소한

신의 존재는

인정하나 봅니다.

잊지 않게 해주소서 내 인생이 서커스라는 것을’이라고,

또,

나의 천박이 나의 금박임을 잊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겸손한 어조로

기도하는 걸

보면요.

설사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그 자기 자신이

신이라는 거잖아요?

예,

시인은

아는 겁니다.

기도는

오직 신께만

하는 것임을요.

그 신이 설사

자기 자신이라고

할지라도요.

하지만 시인이

그 스스로

신이라고 선언했다고 하여

시인을 신이라고

애써

굳이

규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왜냐하면,

‘신’과 ‘시인’은

서로 발음이 비슷하니까요.

‘신’을 조금 길게 발음하고

‘시인’을 조금 짧게 발음하면

둘은 결국

같은 말이니까요.

예,

이 ‘신’과 ‘시인’

사이의

상동성에 대한 언급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굳이

애써

규정하지 않아도

예,

신인 거예요.

우리 모두가 신이듯이요.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아예

못을 박습니다.

우리가 조물주의 창조물일 리가 없다.’라고요.

하긴,

신이 누군가의

창조물일 리가

없지요.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다음 말입니다.

배설물이라면 모를까.’라는 말이요.

아,

신랄합니다.

시니컬합니다.

가차없습니다.

저는 이걸

시인만의 기개라고

느낍니다.

스스로를

신이자 배설물이라고

그 누가 감히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필요한 게

침묵이라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이제 시인은 스스로를

도끼(!)와

동일시합니다.

시인과 도끼는 침묵한다.’라면서요.

게다가 그 침묵은

도끼답게

일격을 노리며.’ 하는

침묵입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일격의 도끼질을

감히 할 수 있는,

해도 되는 자격은

예,

시인한테만

있는 거겠지요.

그러니까

신한테만

있는 거겠지요.

어쩌면,

우리 모두한테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우리가

신이라고 하잖아요?

시인은 이제

말을,

아니, 단어를

바꿉니다.

이렇게요.

살인의 추억 없는 인간도 인간이라 할 수 있소?’라고요.

예,

이번에는

살인입니다.

자살도 결국은

일종의 살인이잖아요?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살인―.

하지만

자살이라고 할 때와

살인이라고 할 때

어감의 차이는

확연합니다.

아마도

시인은

그 어감의 차이를

강조하고 싶었을까요.

살인의 추억이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라고 하는 걸

보면요.

그러니까

자살에 대한,

살인에 대한,

그러니까

바로

죽음에 대한

시인의 집착이

곡진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시인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까지

일갈하네요.

하루의 시작인 아침에조차

세상을 밝히는 태양이

동쪽 수평선 너머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환한 아침에조차

시인은 죽음을,

죽음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

권유합니다.

여기까지,

그러니까

기어이 죽음까지

오고 나서야

비로소

시인은

시를 이야기합니다.

찰지게 쓰는 거요, 시는’이라고요.

자살에서 출발하여

살인을 넘어서

죽음에 도착한 다음

비로소 시인은

‘신’이기를 그만두고

기어코

‘시인’이고자 하는군요.

‘찰지게’라는 부사가

아주

찰지게

가슴을 칩니다.

예,

그는 시인입니다.

마침내, 기어이, 기어코, 한사코, 드디어 그는

스스로 자신을

시인으로

커밍아웃합니다.

결국

그의 뜻은 다음의

딱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떡 치듯이 인생을 들여 음미할 가치가 있는 게 이것 말고 또 있소?’라는

한마디에요.

이거야말로

오직

‘신’이기를

자처하면서도 동시에

그만둔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고백이요

선언이요

정의요

명제 아니겠습니까.

이토록 강렬한

아니, 이보다 더 강렬한

‘시학(詩學)’을

예,

저는 결코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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