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84
CA916. 추창민,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중요한 것은 왕이 아니라, 어떤 왕이냐는 것. 백성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냥 왕이 아니라, 어진 왕이다. 광해 자신도, 광해 흉내를 내는 그도 똑같이 왕이 아니라, 왕이 된 남자다. 처음부터 왕인 사람은 없다. 어느 시점에 왕 된 남자들이다. 그래서 충신들은 그 둘 모두에게 충성할 수 있는 것이다.
CA917. 이마무라 쇼헤이, 〈도둑맞은 욕정〉(1958)
곤 도코(今東光)의 《텐트극장》이 원작. 천막 유랑극단의 애환, 욕정, 세태, 풍자, 긍정. 욕정 코드에 지나치게 꽂히지 않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바른 접근 방법이다.
CA918. 이석근, 〈너의 결혼식〉(2018)
사랑할 수밖에 없고, 다툴 수밖에 없고,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마침내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 또는, 헤어져야만 비로소 서로에게 편히 좋은 감정을 품을 수 있는 사이. 첫사랑. ‘나의’ 결혼식이나 ‘우리의’ 결혼식이 아니라, ‘너의’ 결혼식인 이유. 첫사랑이 아름다우려면 쌍방이 그 이별의 속절없음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두 번째 사랑이, 또는 두 번째 이후의 사랑이 어른의 사랑일 수 있다. 요컨대, 사랑은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먼저 어른이 되어라. 한데, 이 ‘어른 되기’는 이상하리만큼 ‘몸의 나이’와 크게 상관이 없는 사태다.
CA919. 리처드 라그라베니즈, 〈키스〉(1998)
그녀가 끊임없이 환각에 사로잡히는 것은, 또는 상상에 빠져드는 것은 그녀가 아직도 사랑 앞에 솔직하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성숙하지 못한 탓일까. 그녀가 꿈꾸는 것은 스펙터클이다. 생활과는 무관한 스펙터클. 그렇다면 이 영화는 스펙터클로서의 사랑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작의(作意)에 복무하고 있는 걸까.
CA920. 끌로드 고레따, 〈레이스 뜨는 여자〉(1977)
빠스깔 레네의 소설 《레이스 뜨는 여자》가 원작. 창녀의 딸로 시골의 미용사 보조인 여자와 귀족 집안 출신으로 도시의 대학생인 남자의 만남은 처음부터, 어쩌면 당연히, 위태롭고 불안했다. 따라서 여자가 한없이 순종적이고, 남자가 그런 여자에게 유다른 매력을 느꼈어도 그 관계가 마침내 파국에 이르는 것은 어쩌면 운명적이다. 결별의 충격을 못 이겨 정신병원에 수용된 여자를 보며 남자가 깊은 죄의식을 느끼는 마지막 대목의 서글픔과 끔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