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14일 차>
오늘은 A가 개인 사정이 있어서 나오지 않았고, 난 사장님과 카운터에 나란히 앉아있다.
- 여기 계산이론 책 있나요?
- k야 뭐하니? 계산이론 책 가져다 드려라.
- 네? 아, 네네. 잠시만요.
난 카운터인데.. 그래 A가 없으니 사장님이 그냥 나에게 책을 찾아오라고 한 거겠지?
계산이론.. 계산이론이 어디 있지? 으.. 없는데..
- 저.. 사장님 계산이론이 어디에 있을까요..?
- 얘! 너는 왜 그걸 모르니?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사장님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 마디 하더니 책장으로 다가와 책을 찾기 시작했다.
- 뭐야 없네. 학생~ 미안해요. 계산이론 책 재고가 다 떨어졌네. 한 2~3일 후에 다시 오면 주문해 놓을게요.
- 네 어쩔 수 없죠. 안녕히 계세요.
- 미안해요~ 조심히 가요 학생.
손님이 돌아갔고, 난 책장 앞에서 의기소침한 상태로 서있었다.
난 원래 책 정리 알바가 아닌데.. 가르쳐 주지도 않아놓고.. 손님도 있는데 꼭 그렇게까지 소리를 질러야 했나? 너무해.
- k야 뭐해 거기서. 빨리 와서 계산이론 주문 넣지 않고.
- 주문이요? 어.. 어떻게 넣는지..
-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일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는데 그것도 못해?
사장님은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다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가르쳐줘야 알지! 매일 발주는 본인이 다 해놓고선! 계정도 안 알려줬으면서!
불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난 결국 죄송하다며 발주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사장님은 그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나에게 잔소리를 했다.
- k야 근데 나중에 회사 가서도 그렇게 일일이 다 물어볼 거니? 그러면 안돼~ 내가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야.
<알바 20일 차>
결국 일이 터졌다.
그동안 나도 사장님에 대한 불만이 머리 끝까지 치솟고 있었는데 P는 더 많은 일이 있었나 보다.
사장님의 부탁으로 2시간 연장 근무를 하는 동안, P는 나에게 이번엔 꼭 그만둘 거라고 했다. 그리고 사장님이 서점에 오자마자 P는 이번 달까지만 하겠다고 통보했다. 사실상 내일모레까지만 하겠다는 거다.
사장님도 P를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에 생각보다 쉽게 알겠다고는 했지만, P는 그날 내내 사장님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 너 그런 태도로 나중에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리고 끈기 좀 길러라 얘~
P는 재고 정리를 하며
- 아 네네. 나중에 사회 나가서 노예 취급 안 당하려고 그럽니다~ 저도 소중한 우리 엄마 아빠 자식이거든요~ 아니 근데 내가 사회생활도 안 해본 사람한테 이런 소릴 들어야 하나? 어휴
라며 혼자 중얼거렸고, 혹시나 사장님이 듣고 또 싸울까 봐 괜히 나만 조마조마했다.
A도 군대 때문에 이번 달까지만 나오는데.. P까지 그만두다니..
다른 알바를 빨리 구해야 할 텐데..
<알바 27일 차>
힘들다.
A와 P가 모두 그만둔 이후로 난 거의 매일 마감까지 일을 하고 있다. 무려 11시간 30분.
초반 하루 이틀 동안 배고플 때 먹으라며 빵이나 김밥을 사다 주면 일손을 거들던 사장님은 이제 거의 서점에 안 나온다.
아침부터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서점에 와서 하루 종일 서점을 지키다 해가 지면 퇴근을 하다니.. 내가 사장 같네..
그나마 학기 초가 아니라서 손님이 별로 없으니 짬짬이 공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건 내가 원하던 휴학 생활이 아니야.
그래도 어제 연장 시간이 포함된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왔고, 오후 알바도 뽑아달라고 이야기해 뒀으니 일단 기다려보자.
<알바 32일 차>
오전에 사장님한테 전화가 왔다.
- k야 이제 4월 중순이니까 재고 보고 안 팔리는 책들 리스트 좀 만들어 놓고 있어. 오늘 출판사 반품하게. 곧 갈게~
- 네 알겠습니다.
학기 초에 학생들이 책을 다 사고 나면 팔리지 않은 책들은 한 달여 동안은 쌓아두고 있다가 출판사에 반품을 한다. 이제 4월 중순이 지나가니 출판사에 반품처리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이 서점의 책들이라면 빠삭하다.
나는 전산상의 재고와 책장에 있는 실제 재고를 먼저 맞춰본 뒤 그동안의 판매 리스트를 보며 반품할 책들과 수량을 적어두었다.
- 음. 그래 잘 적었네. 저기 상자에 출판사별로 담아서 문 옆에 쌓아두렴. 내가 이대로 반품 신청할게.
박스를 여러 장 들고 출근한 사장님은 리스트를 보며 말했다.
세상에 설마 이걸 나 혼자?
사장님은 간단한 일인 양 말했지만 지금 적힌 대로라면 5박스도 넘을 텐데?
사장님을 한 번 쓱 쳐다봤다. 그녀는 리스트를 보고 반품 신청을 하며 바쁜 척을 하는 듯했다.
그럼 그렇지. 그래도 혹시 신청 다 하면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일단 정리를 시작했다.
첫 번째 출판사로 보내는 박스 하나에만 28권이 들어갔다.
으 엄청 무겁다. 밥도 못 먹어서 더 힘이 없다. 첫 번째 박스만 옮겼는데도 허리가 찌릿하다.
두 번째 박스도 역시 같은 출판사의 책을 넣어야 하는데.. 이 책은 양장이다. 한 권만으로도 엄청 무거워..
창 밖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엔 꼭 같이 하자고 해야지!
- 아 목마르다~ k도 목마르지? 커피 사 올게~ 하고 있어. 날씨 좋다~
입을 뗄 세도 없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양장 책을 보자마자 사장은 커피를 사 오겠다며 부랴부랴 나갔다.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나가는 게 진짜 얄밉다.
결국 혼자서 그 무거운 걸 다 나르느라 팔에 알이 배기고 허리는 곧 끊어질 기세다. 사장은 왜 안 와? 진짜 다 끝나면 오려는 거야?
책이 두꺼워서 그런지 남은 책을 담으니 총 7박스다.. 낑낑대며 마지막 박스를 옮기자 사장이 나타났다.
- 어머 벌써 다했네?
와. 오늘이 제일 최악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 사장님 오후 알바는 대체 언제 뽑으시는 거예요?
더 이상 못 기다리겠어서 화내듯이 물었다.
- 아 말 안 했구나~ 내일부터 출근하기로 했어. 어휴 내가 k 가 하도 닦달해서 뭘 할 수가 없어서 빨리 오라고 했어~
딱 세 번 말했다. 딱 세 번. 두 번째 말할 때 잔소리가 너무 심해서 참다 참다 이제 겨우 세 번.
안 되겠다. 내일 알바 오면.. 나도 진짜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더 이상은 힘들어.
<알바 33일 차>
새 알바는 오후 타임 근무라 오후 2시에 왔다.
나보다 2살 많은 언니였고 사장은 나에게 인수인계를 맡겼다.
이 언니도 카운터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저것 다 시키겠지? 일단 다 알려줘야겠다.
- k야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된 거야?
- 음 한 달 반 정도 됐어요
- 헐 너무 잘 알아서 나는 한 6개월 된 줄 알았어
<알바 35일 차>
언니는 바로 사장의 악덕함을 알아챘고, 우린 같이 사장 욕을 하며 빠르게 친해졌다.
계속 그만두고 싶어 하던 나에게 본인은 괜찮다며 연락이나 자주 하자던 언니의 말에 힘을 얻고 난 사장에게 오늘부로 알바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 k야 이렇게 갑자기 관두기야? 너 정말 후회 안 하겠어?
- 네. 절대요.
<다음 달>
힘들고 지긋지긋한 알바를 그만 둔지 보름 정도 됐고, 어제는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왔어야 하는 날이었다.
혹시 몰라 하루 정도 더 기다렸지만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오지 않았다. 연락해봐야겠어.
- 저 지난달 아르바이트비가 안 들어와서 연락드렸어요.
- 어머 k야. 네가 4월 중간에 그만뒀잖아. 왜 애가 이랬다 저랬다 하니? 원래 중간에 그만 두면 다 날아가는 거야.
- 네? 일한 만큼은 주셔야죠. 연장도 엄청 많이 하고 카운터 말고 다른 것도 많이 했는데..
- 그러게 한 달 더 채우지 그랬니? 그래서 내가 후회 안 하냐고 물으니 안 한다며? 얘가 왜 이래 정말
그냥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첫 한 달치의 아르바이트비만 받은 채 두 번째 달은 보름 동안 무료 봉사를 한 것이다.
속에서 부글부글 울화가 치민다. 사장한테 너무 화가 나는데 사장이랑 또 부딪히기는 더 싫다.
그냥 안 받고 말지..
이렇게 포기해버리는 나한테도 너무 화가 나지만 그래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나는 호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