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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yaya Jun 25. 2019

기억과 망각

블랙미러, <당신의 모든 순간> 리뷰


기억의 순간들

어렸을 적, 시험을 앞두고 펼쳐놓은 책의 내용들이 한 번에 다 기억되길 소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범한 기억력을 가졌고, 영어 선생님의 시험은 너무 까다로웠다. 그래서 난 몇 시간이고 본문을 암기하고 또 암기했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책의 인상 깊은 구절들을 기억하길 바라며, 문장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지만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난 휴대폰의 에버노트 앱에 그 문장들을 기록한다.


모든 순간들을 기억해내는 초인적인 사람들은 매우 드물지만 실제로 존재한다. 소위 HSAM(Highly Superior Autobiographical Memory)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삶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고 절대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언급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평범하게 태어났고, 이런 기질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기억에 관한 다큐멘터리(기억의 해부학)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블랙미러 <당신의 모든 순간>은 기술적으로 조금 더 나아간 세상을 보여준다. 우리의 손에 쥐고 있는 보조기억장치를 더 간편하게 만들어 사람에게 이식하고, 눈에 보이는 매 순간을 동영상으로 저장하여 원할 때 돌려볼 수 있는 세상 말이다. 이런 세상이 온다면 굳이 HSAM이 아니더라도, 행복한 모든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원할 때 다시 꺼내볼 수 있다. 우린 기술 덕분에 한 발짝 더 진보한 것 같다.



망각의 순간들

우리의 기억은 소중하다. 다만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워지기 전까지만 그렇다.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망각이 우리를 구원해주기 전까지 밤잠을 설친다.


특히 우리의 기억이 고도화된 보조장치(특히 휴대폰)에 의존하기 시작하면서, 망각의 축복을 받기는 더 힘들어졌다.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휴대폰에 저장한다. 심지어 행복의 흔적들이 행여 실수로 삭제될까 두려워 클라우드에 데이터를 백업한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의 Core Value는 '당신의 행복을 영원히 저장해드립니다'가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작업들이 의미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삭제' 버튼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버튼처럼 느껴지는 역전이 일어난다. 그 버튼의 무게감이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지라도 구원은 필요하다.


결국 망각은 기억만큼이나 인류의 복지 증진에 중요하다. 행복했던 당신의 모든 순간들을 삭제해야 하는 고통이 수반될지라도 말이다. <이터널 선샤인> 영화 앞에서 코를 푸는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준다.



탐정놀이

<당신의 모든 순간>의 주인공, 망막에 맺히는 동영상을 살펴보는 장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영상으로 저장할 수 있는 시대라면, 상대방의 진술에서 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배우자나 연인의 외도를 파악하는 것도 그러하다. 거짓말 속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 나는 아직도 진실에 의연하게 대면할 자신이 없다.


인류 대다수가 온전한 기억력을 갖지 못한 이유는, 온전한 기억을 가능케 해주는 유전자를 가진 이가 불행에 못 이겨 진작 죽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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