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 15

2부: 시간의 가난세 - 누가 하루 3시간을 도둑질하는가 5

by 일선

3장 시간 사용의 양극화


'시간은 금이다(Time is Money).' 이 격언은 현대 자본주의의 신조로 통한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진실을 은폐한다. 모든 사람의 시간은 같은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시간은 단순한 화폐를 넘어선다. 부를 창출하고 계층을 이동시키는 일종의 '자본'이다. 그리고 이 '시간 자본'은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앞선 1장과 2장에서 한국 사회 시스템이 공간 불평등을 이용해 저소득층에게서 매일 2~3시간의 '시간세'를 징수하고, 이들을 '시간 빈곤층'으로 전락시키는 구조적 폭력을 확인했다. 사회 시스템의 착취는 시간의 양에만 그치지 않는다. 시간 질의 문제와 사용 목적의 왜곡도 발생한다. 사회 시스템은 남은 시간마저 어떻게 사용할지 통제하고 강제한다.


저소득층의 시간은 현재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소모되는 '생존 시간'이다. 반면 고소득층의 시간은 미래의 더 큰 부와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되는 '투자 시간'이다. 이런 대비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시간을 약탈해 부유한 이들에게 이전시키는 사회 시스템이 만든 정교한 설계의 결과물이다.


24시간의 재구성: 생존 시간 vs 투자 시간

시간 사용의 양극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루 24시간을 구성하는 시간의 성격을 재정의해야 한다. 통계청의 생활시간조사(KTUS) 분류(필수, 의무, 자유 시간)를 '목적'과 '통제 가능성'이라는 기준으로 재구성하면 시간의 계급성이 명확해진다.


생존 시간 (Survival Time): 생계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투입해야 한다. 개인의 통제 가능성이 극히 낮은 시간. 장시간 통근, 저임금 장시간 노동, 필수 가사 노동 등이 포함된다. 이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시간 사용이다.


투자 시간 (Investment Time): 미래의 이익(경제적, 사회적, 신체적)을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된다. 개인의 통제 가능성이 높은 시간. 자기 계발, 전문 교육, 네트워킹, 적극적인 건강 관리 등이 포함된다. 이는 미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공격적이고 주도적인 시간 사용이다.


이 분석 틀의 핵심은 저소득층의 하루는 생존 시간으로 가득 차 투자 시간이 구조적으로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반면 고소득층은 사회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생존 시간을 최소화하고 투자 시간을 극대화한다.


시간 양극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계층별로 '1시간'의 가치가 다르다는 데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고소득층의 평균 시간당 임금은 소득 빈곤층보다 2.7배 이상 높다. 이는 저소득층이 동일한 소득을 얻기 위해 고소득층보다 거의 3배 더 많은 시간을 팔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교환 비율은 저소득층을 끊임없는 노동으로 내몬다. 1998년 이후 데이터를 분석한 관련 연구들은 시간당 임금이 낮을수록 오히려 더 오랜 시간 일하는 '시간-소득 트레이드오프(Time-Income Tradeoff)'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줬다. 저소득층은 생존을 위해 시간을 돈으로 바꿀 수밖에 없다. 고소득층은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다. 사회 시스템은 이런 불공정한 교환을 통해 시간 자본의 양극화를 가속한다.


시간 빈곤은 종종 소득 빈곤과 결합해 '이중 빈곤'의 덫을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시간 빈곤이 소득 빈곤보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것이다. 관련 분석에 따르면 취업 가구의 공식 소득 빈곤율은 2.6%였다. 하지만 시간 부족을 고려한 새로운 빈곤율은 7.5%로 약 3배나 높았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빈곤층이 아니지만, 실제로는 장시간 노동과 가사·돌봄 부담으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시간이 박탈된 '숨겨진 빈곤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뜻이다. 특히 맞벌이 가구의 88%가 시간 부족을 겪는다는 조사는 이 문제가 특정 계층을 넘어선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고통은 시간을 대체할 서비스를 구매할 경제적 여력이 없는 저소득층에게 집중된다.


저소득층을 옭아매는 생존의 덫

저소득층의 시간 사용 패턴은 단순한 개인적 선호가 아니다. 사회 시스템이 정교하게 설계한 '생존의 덫'에 갇힌 결과다. 이들은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시간을 소진할 수밖에 없다. 이는 빈곤 탈출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악순환의 고리, 즉 '서바이벌 루프'를 형성한다.


서바이벌 루프의 핵심 동력은 '에너지의 고갈'이다. 저소득층의 삶은 시간을 쪼개 생존을 이어가는 현실이다. 낮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편의점 야간 근무를 하며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의 사례처럼, 이들은 생계를 위해 복수의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한다. 여기에 장시간의 통근과 고된 육체노동, 감정노동이 더해지면 인간의 에너지는 완전히 소진된다.


녹초가 돼 집에 돌아온 저녁, 이들에게 남은 것은 피로와 무기력뿐이다. 이 상태에서는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자기 계발이나 학습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가장 손쉬운 방식인 수동적 휴식을 강요당한다.


사회 시스템은 이를 개인의 나태함으로 치부하며 '더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구조적 폭력이다. 사회 시스템은 저소득층의 에너지를 극한까지 착취한다. 그들이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동력마저 빼앗는다. 이는 저소득층을 현재에 가두고 미래를 포기하게 만드는 가장 교묘한 방식의 통제다.


더 큰 문제는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불안정한 고용 형태(시간제, 플랫폼 노동, 일용직 등)는 규칙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시간 계획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들은 언제 일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끊임없이 대기해야 한다. 이런 시간의 예측 불가능성은 장기적인 계획 수립을 방해한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에게 '덩어리 시간', 즉 무언가를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연속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저소득층은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 즉 '시간 주권'을 박탈당한다. 이들의 시간은 사회 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주체적으로 삶을 설계하는 데 사용되지 못한다.


저소득층은 일상 곳곳에서 사회 시스템의 비효율성이 전가한 '대기 시간'도 강요당한다. '제도적 시간세'라고 부를 수 있다. 가난을 증명하고 복지 서비스를 신청하기 위해 관공서에서 보내야 하는 긴 대기 시간, 복잡한 서류 준비 과정은 생계를 위해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저소득층에게 치명적인 부담이다. 비용 문제로 대형 병원을 찾았을 때 발생하는 긴 진료 대기 시간도 마찬가지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의 시간을 하찮게 취급한다. 모든 사회적, 행정적 비효율성의 비용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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