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 16

2부: 시간의 가난세 - 누가 하루 3시간을 도둑질하는가 6

by 일선

고소득층의 자본 축적 기술

반대편 극단에는 고소득층의 시간이 있다. 이들의 시간 사용 패턴은 '인베스트먼트 루프(Investment Loop)', 즉 시간을 자본으로 전환해 더 큰 부와 기회를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사회 시스템은 이들의 시간을 보호하고, 그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소득층은 구조적으로 풍부한 시간 자원을 확보하고 '시간 주권'을 독점한다. 가장 큰 요인은 '공간의 통제'다. 이들은 일자리와 가까운 도심 핵심지에 거주하면서 통근 시간을 최소화한다. 매일 1~2시간 이상의 추가적인 자유 시간을 확보한다.


노동 시간 역시 효율적으로 관리된다. 고소득층은 유연 근무제, 재택근무 등 자신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다. 정보기술(IT) 기업의 고소득 전문직이 재택근무를 통해 출퇴근 스트레스 없이 업무 효율을 높이는 사례는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한국은행의 분석(BOK 이슈 노트-근무 여건 선호와 노동시장 변화)은 '근무 여건의 격차'가 실질적인 소득 불평등을 더욱 심화한다는 것도 보여줬다. 유연근무, 유급휴가 등 양질의 근무환경을 화폐가치로 환산해 소득 격차를 다시 계산한 결과, 소득 5분위 배율이 기존 4.0배에서 4.2배로 악화했다. 이는 고소득층이 임금 외에 '시간 자본'이라는 추가적인 혜택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확보된 풍부한 시간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이어진다. 고소득층은 시간을 이용해 다양한 형태의 자본을 축적하며, 이는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인적 자본(Human Capital): 이들은 끊임없이 학습하고 자기 계발에 투자한다. 전문 교육 과정 이수, 새로운 기술 습득 등은 이들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소득 증대와 계층 상승을 위한 강력한 발판이 된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고소득층은 네트워킹에 많은 시간을 전략적으로 투자한다. 다양한 전문가 모임, 고급 커뮤니티 활동(골프 등)을 통해 고급 정보를 교류하고 영향력을 확대한다. 이런 배타적인 사회적 관계망은 경제적 성공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건강 자본(Health Capital): 이들은 건강 관리에 적극적으로 시간을 투자한다. 규칙적인 운동(PT 등 전문 관리), 양질의 식사, 예방적 의료 서비스 이용 등은 신체적, 정신적 활력을 증진한다.


이처럼 고소득층은 시간을 투자해 경제 자본뿐만 아니라 인적, 사회적, 건강 자본을 동시에 축적하며 난공불락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다.


시간의 구매와 의무의 외주화

고소득층이 '투자 시간'을 극대화할 수 있는 주요 메커니즘은 '타인의 시간을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높은 소득을 이용해 의무 시간을 줄이고 자유 시간을 늘린다.


가사 노동, 육아, 돌봄 등 전통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무급 노동을 가사도우미, 보육사 등에게 외주화한다. 이는 돈으로 시간을 사는 행위다. 이 '시간 구매'는 시간 불평등을 심화하는 핵심 동력이다. 고소득층은 자신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저소득층의 시간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한다. 고소득층의 시간을 절약해주는 서비스 노동(가사, 돌봄, 배달 등)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다. 이들은 다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시간 빈곤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사회 시스템은 한 계층의 시간적 풍요가 다른 계층의 시간적 빈곤을 기반으로 유지되도록 설계돼 있다. 이는 부유한 자에게로의 시간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저소득층과 중산층에게 시간 구매는 그림의 떡이다. 관련 연구에서는 소득 4~5분위(중산층) 여성이 시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 서비스를 구입하려면 자신의 소득 90%를 지출해야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대다수 계층에게 시간 외주화가 비현실적인 선택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불평등의 교차

시간 사용의 양극화는 단순히 양적인 차이를 넘어 질적인 차이로 이어진다. 이는 다른 형태의 불평등과 교차하며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여가의 사용 방식은 '문화 자본'과 깊이 연관된다. 여가 활동의 격차는 계급을 구분 짓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동한다. 저소득층의 여가는 비용이 적게 들고 접근성이 좋은 활동, 주로 수동적인 미디어 소비에 집중된다. 이는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유일한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은 장기적인 발전이나 사회적 관계 형성에는 기여하지 못한다.


반면 고소득층은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여가 활동에 참여한다. 문화 예술 관람, 창작 활동, 고급 스포츠, 여행 등은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제공한다. 이런 활동은 개인의 교양과 안목을 높여주는 문화 자본으로 축적된다. 이는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상징적 자원이 된다. 이런 여가 활동은 종종 사회적 자본의 축적(네트워킹)과 결합한다.


시간의 양극화는 젠더 문제와 교차하며 가장 취약한 집단에 고통을 집중시킨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 가사 노동과 돌봄의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불균등하게 배분되고 있다. 이는 여성의 시간 빈곤을 심화한다. 저소득층 여성은 계급적 불평등과 젠더 불평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중, 삼중의 착취 구조에 놓인다. 이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통근에 시달리는 동시에, 퇴근 후에는 가사와 돌봄이라는 '제2의 출근'을 감당해야 한다. 자녀가 있는 저소득 여성은 유급 노동, 가사, 돌봄의 삼중고로 인해 가장 극심한 시간 빈곤을 겪는다.


시간 불평등의 세계적 현상

시간 사용의 양극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양상과 대응 방식은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일과 생활 균형 지수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도 심각한 시간 불평등을 겪고 있다. 미국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피고용자의 비율이 2018년 80%까지 상승했다. 이는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의 체감 시간 여유는 오히려 줄어드는 '시간의 역설'을 보여준다. 소득 불평등이 시간 불평등으로 전이되고 있다.


반면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시간 주권'과 '시간 복지'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시간 불평등 완화를 시도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대표적인 사례다. 2016년 제정된 탄력근무제법에 따라 노동자는 자신의 주당 근무 시간을 줄일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는다. 사용자의 동의 없이도 시간제 근무로 전환할 수 있다. 근로 시간 감소로 소득이 줄어들 경우 부분 실업급여를 지원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가 소득 감소 걱정 없이 근로 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게 했다. 네덜란드 성인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30시간 남짓으로 OECD에서 낮은 수준이다.


독일 역시 '엘터른차이트(Elternzeit)' 제도를 통해 부모가 육아휴직 기간 시간 단축 근무를 유연하게 병행할 수 있도록 했다. 경력 단절을 막고 돌봄 시간도 확보하도록 장려한다. 이런 유럽의 실험들은 시간의 분배가 시스템의 설계를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에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정규직 vs 비정규직)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국에서 시간제 일자리는 대부분 저임금의 질 낮은 일자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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