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 17

3부: 몸의 가난세 - 사회 시스템이 부과하는 고통 1

by 일선

1장 아프면 더 가난해진다


가난세의 여정은 길고도 집요하다. 1부에서 금융, 주거, 유통 시스템이 어떻게 가난한 이들의 지갑을 체계적으로 착취하는지 확인했다(돈의 가난세). 2부에서는 공간 불평등이 어떻게 그들의 유한한 시간을 약탈해 '시간 빈곤층'으로 전락시키는지 알아봤다(시간의 가난세). 이 모든 세금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인간의 몸이다.


'몸의 가난세(Body Poverty Tax)'는 시스템이 부과하는 가장 잔인하고 비극적인 세금이다. 금전적 빈곤과 시간 빈곤은 필연적으로 건강의 악화를 초래한다. 이는 고스란히 가난한 이들의 몸에 새겨진다.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스트레스, 박탈, 위험은 혈관을 타고 흐르다 질병이 되고, 결국 생명마저 단축한다.


이번엔 한국 사회의 건강 불평등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그리고 '돈'과 '시간'의 부족이 어떻게 예방 의료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고 질병을 키우며, 마지막엔 치료마저 포기하게 만드는지 살펴볼 것이다. '아프면 더 가난해지고, 가난하면 더 아파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해부한다. 건강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신화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확인할 것이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가장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고 있다.


몸에 새겨진 계급장

대한민국은 전 국민 대상 건강보험 제도를 운용하는 국가다. 표면적으로는 누구나 평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의 표면 아래를 들여다보면 건강은 철저하게 계급화돼 있다. 소득 수준에 따라 건강 상태는 물론, 생명의 길이까지 달라지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가장 기본적인 지표인 기대 수명에서부터 격차는 뚜렷하다. 2017년 기준 소득 상위 20%의 기대수명은 85.80세였다. 하지만 하위 20%는 79.32세에 불과했다. 무려 6.48년의 격차다. 이 격차는 주요 선진국 중에서도 두드러진다. 2030년에는 약 6.7년까지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 문제는 '건강 수명(유병 기간을 제외하고 건강하게 지낸 수명)'의 격차다.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의 문제를 넘어 삶의 질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분배되는지 보여준다. 2011년부터 2021년 사이 10년간의 분석한 조사에 따르면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건강 수명 차이는 7.1세에서 8.2세로 오히려 확대됐다. 상위층의 건강 수명이 73.4세까지 늘어나는 동안 하위층은 65.2세에 머물렀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보다 8년 이상 먼저 병들기 시작하며,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낸다는 뜻이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에게 조기 노화와 '피할 수 있는 죽음'의 위험을 부과하고 있다.


질병의 불평등

만성 질환 유병률 역시 소득 수준과 정확히 반비례한다. 양극화는 심화하고 있다. 2018년과 2022년 관련 통계를 비교하면 남성 고혈압 유병률의 소득 1분위(하위) 대 5분위(상위) 격차는 5.4% 포인트에서 7.7% 포인트로 커졌다. 특히 남성 비만 유병률 격차는 1.1% 포인트에서 4.2% 포인트로 급증했다. 경제적 취약성이 생활습관병으로 직결되는 구조가 더욱 공고해진 것이다.


같은 질환을 앓고 있더라도 저소득층은 합병증 발생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는 예방과 조기 치료의 실패가 누적된 결과다. 당뇨병 환자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국민건강보험 데이터 분석한 조사 결과를 보면 저소득 취약계층 당뇨병 환자는 합병증인 족부 궤양(당뇨발)으로 발을 절단할 위험이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최대 5.13배 높았다. 5년 내 사망 위험도 2.65배나 높았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발을 잘라내야 하고, 더 일찍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빈곤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 파괴한다. 의료급여 수급을 5년간 받은 저소득 그룹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울증 발병 위험이 69%나 높다는 보고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건강은 가장 불평등하게 분배된 자원이다.


돈과 시간의 가난세가 건강을 파괴하는 메커니즘

'몸의 가난세'는 어느 날 갑자기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1부와 2부에서 다룬 금전적 가난세와 시간적 가난세가 장기간 축적돼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다. 사회 시스템은 다차원적인 경로를 통해 가난한 이들의 건강을 갉아먹는다.


1부에서 확인했듯, 저소득층은 가장 비싼 면적당 임대료를 지불하면서도 가장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된다.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는 단순히 좁은 공간이 아니라, 건강을 위협하는 물리적 위험 요소의 집합체다. 반지하의 습기와 곰팡이는 호흡기 질환과 피부 질환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채광과 환기가 불가능한 고시원과 쪽방은 감염병에 취약하다. 거주자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에너지 효율이 극도로 낮은 노후 주택은 폭염과 혹한에 거주자를 그대로 노출하는 '에너지 빈곤'을 야기한다. 이는 심혈관 질환의 위험을 높인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을 '질병을 유발하는 공간'에 가두고, 그 비용을 그들의 몸으로 지불하게 한다.


1부에서 다룬 유통 가난세는 저소득층의 식생활도 파괴한다. 현금 유동성 부족, 비좁은 저장 공간 그리고 조리 시간의 부족은 신선 식품 구매를 어렵게 만든다. 저소득층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포만감을 얻을 수 있는 식품, 즉 고탄수화물, 고지방, 고나트륨의 가공식품이나 라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영양 불균형은 비만, 당뇨, 고혈압 등 만성 질환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비싼 단가의 생필품을 강요하면서, 동시에 가장 값싸고 해로운 칼로리를 섭취하도록 유도한다. 그들의 혈관을 망가뜨리고 있다.


수면 박탈과 만성 스트레스

2부에서 확인한 '시간 빈곤'은 건강 파괴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장시간의 통근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생존의 기본 조건인 수면 시간을 침식한다. 시간 빈곤층은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이는 면역력 저하와 심혈관 질환 위험을 급격히 높인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이나 휴식은 이들에게 사치다. 더 치명적인 것은 시스템이 유발하는 만성적인 스트레스다. 극심한 혼잡 속의 출퇴근길, 불안정한 고용, 끊임없는 시간 압박은 코르티솔 등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를 만성적으로 높여 신체 염증 반응을 유발하고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저소득층의 높은 우울증 발병률은 이런 구조적 스트레스의 결과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의 시간을 착취하면서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회복력도 파괴하고 있다.


저소득층은 사회 시스템이 설계한 다중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의 몸은 시스템의 폭력을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받아내는 전쟁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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