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가난세 보고서 20

3부: 몸의 가난세 - 사회 시스템이 부과하는 고통 4

by 일선

정신 건강의 파괴

장시간 통근의 대가는 신체 건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심각한 것은 정신 건강의 파괴다. 매일 반복되는 고통스럽고 비인간적인 이동 경험은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불안과 우울을 증폭시키며, 종국에는 삶의 만족도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킨다.


지난 2020년 한국 근로자 25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통근 시간이 증가할수록 우울 증상, 불안, 피로 위험이 단계적으로 높아지는 명확한 경향이 확인됐다. 하루 통근 시간이 30분 이하인 집단과 비교했을 때, 120분을 초과하는 집단은 우울 증상을 겪을 위험이 1.31배 높았다.


불안감의 증가는 더욱더 극적이다. 통근 시간이 2시간을 초과할 경우, 불안 장애를 겪을 위험은 무려 1.89배까지 치솟았다. 장시간 통근이 단순한 스트레스를 넘어, 심각한 정신 질환의 위험 요인이었다.


왜 장시간 통근은 이토록 정신 건강에 치명적인가? '통제 불가능한 스트레스'이기 때문이다. 극심한 혼잡, 예측 불가능한 지연, 불쾌한 환경 등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다.


인간은 통제할 수 있는 스트레스보다 통제 불가능한 스트레스에 훨씬 더 취약하다. 매일 반복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노출되면 깊은 무력감과 좌절감에 빠지기 쉽다. 이는 불안 장애와 우울증의 핵심 원인이 된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에게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이동을 강요한다. 그들의 심리적 회복력을 파괴하고 있다.


장시간 통근은 각종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통근 과정에서 이미 에너지를 소진해버리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영위할 활력이 남아있지 않다. 이는 만성적인 피로와 무기력감, 즉 번아웃으로 이어지기 쉽다. 앞서 언급한 연구에서도 통근 시간이 120분을 초과할 경우 만성 피로 위험이 1.51배 증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에너지가 고갈되는 이 구조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활력을 저해하는 심각한 문제다.


시간 주권의 박탈

장시간 통근은 '시간 주권', 즉 자신의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박탈한다.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을 오롯이 이동에 바쳐야 하는 삶은 근본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다.


경제학에서는 '통근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있다. 하지만 저소득층에게 이는 '역설'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조적 비극'이다. 이들은 주거비를 아끼기 위해 통근을 감수했지만, 그 결과로 건강과 행복을 잃고 있다. 서울시의 조사 결과, 통근 시간이 길수록 가정생활 및 사회생활 만족도가 저하되는 경향이 30대 이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의 시간을 착취하면서 그들에게서 행복할 권리마저 빼앗고 있다.


장시간 통근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유지할 시간을 물리적으로 박탈한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은 가족과 함께 식사하거나 친구를 만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진다. 특히 부모의 시간 빈곤은 자녀와의 관계 단절로 이어져 가족 해체의 위기를 초래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저출산 문제와도 깊이 연관된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정신적 빈곤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빼앗긴 시간의 무게

장시간 통근이 부과하는 시간세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구체적인 경제적 손실로 환산될 수 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통근 시간 1시간의 경제적 비용 가치는 한 달에 약 94만 원으로 추산된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매일 왕복 2시간을 통근에 소비하는 사람은 월 188만 원 상당의 시간 가치 손실을 보는 셈이다. 왕복 3시간을 소비하는 수도권의 극한 통근자라면, 그 손실액은 월 280만 원을 넘어선다.


저소득층이 주거비를 아끼기 위해 감수하는 비용으로는 너무나 막대하다. 표면적으로는 주거비를 절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가치의 시간을 길바닥에 버리고 있다. 더욱이 이 시간 손실은 앞서 설명한 건강 악화(몸의 가난세)로 인한 의료비 지출과 노동 생산성 저하(돈의 가난세)라는 추가적인 비용까지 발생시킨다. 사회 시스템은 시간 착취를 통해 다중의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고 있다.


불평등의 증폭 장치

장시간 통근의 건강 영향은 모든 계층에게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소득 수준에 따라 극명하게 차별화된다. 기존의 건강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강력한 증폭 장치로 작동한다. 사회 시스템은 통근의 방식마저 계급화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부과한다.


1. 이동 수단의 불평등: 통제권 vs 위험 노출

가장 큰 차이는 이동 수단에서 발생한다. 고소득층은 주로 자가용을 이용해 출퇴근한다. 자가용 통근은 독립된 공간을 보장하며, 혼잡으로 인한 물리적 압박이나 불쾌한 접촉, 감염병의 위험에서 자유롭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리적 안정감(통제감)을 제공한다.


반면 저소득층은 비용 문제로 인해 대중교통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모든 위험 요소(혼잡, 소음, 스트레스, 통제 불가능성)에 그대로 노출된다. 동일한 시간을 이동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건강 위험과 심리적 고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2. 인프라의 불균형과 추가적인 고통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외곽 지역은 대중교통 인프라가 부족해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배차 간격이 길어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노선이 비효율적이어서 여러 번 환승해야 한다. 환승 과정에서 발생하는 추가적인 이동과 대기 시간은 신체적 피로와 스트레스를 가중한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을 인프라가 열악한 곳으로 밀어내고, 그 결과 발생하는 고통을 방치한다.


3. 회복력의 격차: 건강을 관리할 자원의 부재

더 근본적인 문제는 통근으로 인해 손상된 건강을 회복할 자원의 격차다. 고소득층은 충분한 휴식, 양질의 영양 섭취, 건강 관리 서비스, 고급 의료 서비스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저소득층은 시간 빈곤과 금전적 빈곤으로 이런 회복력을 갖추기 어렵다. 이들은 아파도 쉴 수 없고(3부 1장 참조), 병원에 갈 시간도, 돈도 부족하다. 만성 피로와 통증을 안고 다시 지옥철에 몸을 실어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사회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큰 위험을 부과하면서, 그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단은 박탈하고 있다.


건강 악화가 빈곤을 고착화하다

장시간 통근이 유발하는 건강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금전적 빈곤을 심화시키고, 빈곤의 악순환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고리가 된다. '시간세'가 '몸의 가난세'를 낳고, '몸의 가난세'가 다시 '돈의 가난세'를 강화하는 완벽한 착취 구조다.


1. 의료비 부담의 증가

만성 질환(심혈관, 대사, 근골격계)과 정신 질환(우울, 불안)은 필연적으로 의료비 지출 증가로 이어진다. 가처분 소득이 부족한 저소득층에게 이러한 의료비 증가는 치명적이다. 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또다시 빚을 지거나, 필수적인 지출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주거비를 아끼기 위해 장시간 통근을 감수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발생하는 시간 비용 손실(월 188만 원 이상)과 의료비 부담이 더 클 수 있다.


2. 노동 능력의 상실과 소득 감소

건강 악화는 노동 생산성 저하와 직결된다. 만성적인 피로, 통증, 집중력 저하는 업무 효율을 떨어뜨린다. 특히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비율이 높은 저소득층에게 근골격계 질환이나 심혈관 질환은 생계 수단의 박탈을 뜻한다. 건강 악화로 실직하거나 더 불안정한 일자리로 밀려나게 되면,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3. 사회적 비용의 증가와 시스템의 비효율성

개인의 건강 악화는 사회 전체적으로도 막대한 비용을 초래한다. 노동 생산성 저하, 의료비 증가로 인한 건강보험 재정 부담 가중 등이 그것이다. 또한 장시간 통근으로 교통 혼잡 비용은 서울에서만 연간 수조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사회 시스템은 효율성을 명목으로 주거와 일터를 분리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개인의 건강 파괴와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라는 비효율성으로 돌아오고 있다.


결국 시스템은 가난한 이들의 시간을 착취해 그들의 건강을 파괴하고, 이를 통해 그들을 다시 빈곤의 덫에 가두는 악순환을 완성한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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