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돈의 가난세 - 가난할수록 비싸지는 것들 2
20%의 벽과 풍선효과: 보호막인가, 불법 사금융으로 추방인가
대한민국은 법정 최고금리를 연 20%로 정해두고 있다. 하지만 연 20%는 국제적으로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저신용자에게는 사실상 '기준 금리'처럼 작동한다. 상한선은 보호막이 아니라, 합법적인 착취가 허용되는 최대 한도액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법정 최고금리 인하(과거 24%에서 20%로)가 역설적으로 저신용자를 제도권 금융에서 완전히 퇴출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2025년 현재, 이 '풍선효과'는 재앙적인 수준으로 현실화했다.
수익성 악화를 우려한 대부업체는 대출 심사를 강화하면서 대출 공급은 급격히 축소됐다. 120만 명이 넘던 대부업 이용자가 2022년 6월 71.4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대부업권의 신용대출 잔액은 반토막이 났다. 관련 조사에 따르면 신용 하위 20% 중 약 150만 명가량이 공식 금융권에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향한 곳은 바로 불법 사금융 시장이다. 불법 사채 이용자(약 82만 명)가 합법 대부업 이용자를 추월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시스템은 저신용자들을 합법적 고금리 시장에서 연 1200%가 넘는 이자가 횡행하는 불법적 초고금리 시장으로 밀어 넣었다. 일부 정치권에서 최고금리를 15%로 추가 인하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수십만 명을 불법 시장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선의의 규제가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책 금융의 한계: 줄어드는 공급과 또 다른 가난세
정부도 '햇살론'과 같은 정책서민금융 상품을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한계는 명확하다. 저신용·저소득층 대상의 '햇살론15'의 금리는 연 15.9%다. 이는 고신용자의 4~5%대 금리보다 3배 이상 높다. 정책 금융조차도 '가난세'를 부과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조차도 저소득층의 위험 비용을 당사자에게 전가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책서민금융의 공급량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2024년 1~7월 정책서민금융 공급액은 전년 동기 대비 33%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정부가 2025년에는 공급 규모를 역대 최대인 11.8조 원 수준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경기 악화로 인해 심사 문턱이 높아져 서민금융 이용 거절률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책금융은 근본적인 해결책 대신 시혜적인 접근에 머물며 '임시방편'에 그치고 있다.
시간으로 환산된 이자: 금융 가난세에서 시간 가난세로
금전적 가난세는 필연적으로 '시간 가난세(Time Tax)'로 이어진다. 고금리 부채는 단순히 돈을 앗아가는 것을 넘어, 개인의 현재 시간과 미래의 가능성마저 착취한다.
앞선 사례에서 저신용자 C씨는 고신용자 A씨보다 5년간 약 848만 원의 이자를 더 부담해야 했다. 이 848만 원을 2025년 기준 최저시급(약 1만 원 가정)으로 환산하면, C씨는 A씨와 동일한 돈을 빌렸다는 이유만으로 848시간을 더 일해야만 한다. 1년에 약 170시간, 한 달에 약 14시간씩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이자 비용으로 시스템에 헌납해야 한다.
이 848시간은 C씨가 자기 계발하거나, 건강을 돌보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심지어 잠을 잘 수 있었던 시간이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높은 이자를 통해 이 시간을 조직적으로 착취한다.
늘어난 이자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저소득층은 노동 시간을 늘릴 수밖에 없다. 이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악화하고(3부에서 다룰 '몸의 가난세'와 연결된다),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할 기회를 박탈한다. 결국 저소득층은 생존을 위해 돈을 빌리지만 그 이자 때문에 시간을 빼앗긴다.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인다.
글로벌 가난세 보고서: 보편적 약탈과 다양한 규제 실험
금융 시스템이 가난한 이에게 더 높은 비용을 부과하는 현상은 자본주의 금융 시스템에 내재한 보편적인 현상이다. 각국의 사례를 비교해보면, 규제의 방식에 따라 그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페이데이 론(Payday Loan): 연 400%의 약탈 경제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미국의 '페이데이 론'이다. 연이율(APR)은 평균 약 400%에 달한다. 이용자의 80% 이상이 14일 이내에 재대출을 받으며 '부채의 덫(Debt Trap)'에 빠진다. 최근 미국 내 약 20개 주에서는 36% 이자 상한 등 강력한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영국의 빈곤 프리미엄(Poverty Premium): 다각화된 착취와 규제
영국에서는 저소득층이 금융뿐만 아니라 에너지 요금, 보험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는 '빈곤 프리미엄' 연구가 활발하다. 금융 부문에서는 영국 금융감독청(FCA)이 페이데이 론의 총상환액을 원금의 2배 이내로 제한하는 등 강력한 조처를 했다.
프랑스와 독일: 강력한 규제와 금융 배제의 딜레마
유럽 대륙 국가는 한국과 대조를 이룬다. 프랑스는 반고리대법(Loi Usure)에 따라 2025년 기준 소비자신용 최고금리를 약 6~7% 수준으로 매우 낮게 규제한다. 이는 시장 평균 금리의 약 1.5배를 넘으면 불법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명시적인 상한선은 없다. 하지만 판례상 시장 평균 금리의 2배를 초과하거나 평균 금리 +12% 포인트를 넘는 경우 '현저히 부당한 이자'로 간주하여 무효로 한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연 15% 이상의 금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강력한 규제는 저신용자들이 아예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일본과 캐나다의 중도적 접근
일본은 원금 규모별로 15~20%의 이자 상한을 두고 있다. 캐나다는 연방 형법상 최고이자율을 기존 60%에서 2025년 1월 1일부터 35% APR로 대폭 인하하며 약탈적 대출 퇴치에 나서고 있다.
이런 글로벌 사례들은 규제 정책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강력한 규제는 금융 배제를 낳고, 자유방임은 취약층 착취를 심화한다. 금리 규제와 함께 금융 접근성을 높이는 정책적 조합이 필수적이다.
알고리즘 신분제: AI 신용평가의 명암과 편향성의 위협
최근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차별은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반의 신용평가 모델이 확산하면서 기존의 편향성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오히려 차별이 자동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공존한다.
전통적인 신용평가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 은행과 핀테크 기업들은 비금융 데이터(통신 요금 납부내역, 소비패턴 등)와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활용해 중저신용자를 재평가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일부 인터넷 은행은 AI 평가를 통해 중·저신용자 대출 공급을 늘리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AI 신용평가도 심각한 위험 가능성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블랙박스' 문제와 '데이터 편향성'이다.
첫째, 복잡한 AI 알고리즘은 결과를 직관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기 어렵다(설명 불가능성). 고객은 왜 대출이 거절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소비자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 금융당국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2023년 'AI 신용평가모형 검증체계'를 마련해 설명 가능성을 점검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계는 명확하다.
둘째, AI 모델은 훈련 데이터에 존재하는 사회적 편향을 그대로 학습하고 오히려 강화할 위험이 있다. 과거 데이터가 이미 저소득층이나 특정 집단에 불리했다면, AI는 그 패턴을 최적화하여 차별적인 결과를 재생산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9년 미국의 '애플카드 사건'이다. AI 심사에서 신용점수가 더 높은 아내가 남편보다 카드 한도를 훨씬 적게 받는 성차별적 결과가 발생해 큰 논란이 됐다. 뉴욕 금융당국이 조사에 착수했다. 이는 AI가 겉보기에 중립적인 변수들을 조합해 결과적으로 특정 집단을 차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리즘에 내재한 편향과 불평등의 코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AI 시대의 신용평가 시스템은 과거의 신분제보다 더 교묘하고 강력한 '알고리즘 신분제'로 작동할 것이다. 기술은 오히려 차별을 자동화하고 효율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