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돈의 가난세 - 가난할수록 비싸지는 것들 1
1장 이자 폭탄: 신용점수라는 현대판 알고리즘 신분제
세상에서 가장 역설적인 가격표는 '돈의 가격', 즉 이자율에 붙어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의 필수 자원인 돈은 시장 원리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하게 사람을 차별한다. 돈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일수록, 그 돈을 빌리기 위해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가난할수록 돈의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2025년 현재, 이 역설은 더욱 정교하고 잔인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난세(Poverty Tax)' 혹은 '빈곤 프리미엄(Poverty Premium)'이라 부르는 사회 시스템적 착취의 첫 번째 얼굴이다. 핵심 논지는 명확하다. 한국의 금융 시스템은 저소득층에게 체계적으로 더 높은 금리, 즉 더 높은 ‘단가’를 강제하며, 이 ‘추가 비용’을 가난세로 징수한다. 이는 개인의 실패나 부주의의 결과가 아니다. 정교하게 설계된 시스템, 특히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로 무장한 현대 금융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착취다.
이 보이지 않는 세금은 너무나 교묘하게 설계돼 있다. 피해자들조차 자신이 세금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신용점수'가 낮기 때문에 높은 이자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 당연함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불공정한 징수 시스템의 최전선에는 '신용점수'라는 현대판 신분제가 자리 잡고 있다. 이제 그 신분제를 관리하는 알고리즘의 편향성 문제까지 떠오르고 있다.
신용점수, 합리적 차별인가 구조적 폭력인가
우리는 법 앞에 평등한 민주 시민이라고 배우지만, 금융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1점부터 1000점 사이의 숫자로 환원된다. 이 점수는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 개인의 경제적 운명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금융기관은 이 점수를 바탕으로 미래 위험을 예측한다. 그 위험도에 비례해 금리를 책정하는 ‘위험 기반 가격 책정(Risk-based Pricing)’을 따른다. 표면적으로는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합리성'의 이면에는 깊은 구조적 차별과 폭력이 숨겨져 있다. 문제는 신용점수를 결정하는 요인이 이미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신용평가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이미 경제적 기반이 탄탄해 안정적인 금융 생활을 영위해 온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돼 있다. 이들은 낮은 금리로 자산을 증식하고, 신용점수는 더욱 공고해지는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반면 해당 시스템은 저소득층을 체계적으로 배제한다. 소득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등은 자동적으로 '고위험군'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작은 외부 충격에도 쉽게 연체의 늪에 빠진다. 이는 가난한 이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해서가 아니다. 삶의 위기는 약자에게 먼저 찾아오고 더 가혹하다. 단 한 번의 연체 기록은 낙인처럼 남아 수년간 신용점수를 억누른다. 문제의 시스템은 그가 왜 연체했는지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결국 시스템은 개인의 미래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과거로부터 누적된 불평등'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다시 한번 세금(가난세)을 매긴다. 가난하기 때문에 신용점수가 낮고, 신용점수가 낮기 때문에 더 비싼 금융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 결과 다시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이 시스템은 구조적 빈곤의 문제를 개인의 신용 관리 실패로 교묘하게 치환한다. 이는 금융 이력이 부족한 이른바 '씬 파일러(Thin Filer)'(사회초년생, 주부, 고령층 등)에게 더욱 가혹하게 작동한다. 시작선부터 고금리 대출의 족쇄를 채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융 피라미드와 체계적 배제: 2025년의 현실
신용점수가 만들어낸 계급 구조는 대한민국 금융 시스템의 위계질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거대한 피라미드 구조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비용은 급격하게 증가한다. 2025년 현재, 이 피라미드는 더욱 가팔라졌다.
1단계: 제1금융권(시중은행) -난공불락의 요새
피라미드의 최상층인 시중은행은 신용점수 900점 이상의 고신용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2025년 상반기 기준, 이들은 연 4~6% 수준의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한다. 2025년 3월 KB국민은행의 일반 신용대출 평균금리는 4.37%였다. 하지만 신용점수가 700점대 이하로 내려가면 이 요새의 문은 굳게 닫히거나, 승인되더라도 9% 안팎의 높은 금리가 적용된다. 이 시스템은 저소득층을 가장 저렴한 자금원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한다.
2단계: 제2금융권(저축은행, 카드사, 캐피탈 등) -고비용의 시작과 '금리 절벽'
1금융권에서 밀려난 '금융 난민'들은 2금융권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거대한 '금리 절벽'이 존재한다. 은행에서 연 6%로 거절당한 사람이 저축은행으로 가면 갑자기 연 12~18%의 금리를 제안받는다. 2025년 현재 주요 저축은행의 중신용자 신용대출 금리는 평균 14~17% 수준이다. 이는 2금융권이 저신용자들의 '대안 부재'를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높은 이자율은 '위험'에 대한 비용이 아니다. '사회적 취약성'에 대한 비용 청구서에 가깝다.
3단계: 대부업체 (일명 3금융권) -합법적 약탈의 경계
신용점수가 600점 이하로 떨어지면 결국 대부업체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2025년 현재 이곳의 금리는 기준금리 인상 등의 영향으로 평균 19% 안팎까지 올라갔다. 대부분 법정 최고금리인 연 20%에 육박한다. 연 20%는 원금의 5분의 1을 매년 이자로 내야한다는 것을 뜻한다.
4단계: 불법 사금융 -시스템 밖의 나락
제도권 금융에서 완전히 퇴출된 최저신용자들은 불법 사금융 시장으로 내몰린다. 관련 데이터는 충격적이다. 2022년 기준 불법사채 이용자 수가 약 82만 명으로 급증했다. 사상 처음으로 합법 대부업 이용자 수(약 71만 명)를 추월했다고 한다. 이곳은 무법지대다. 2023년 한 설문에서는 불법사채 이용자의 17%가 연 1200% 이상의 살인적인 이자를 감당하고 있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300만원 빌렸다 1억원 빚지는' 사례가 나올 수 있다.
2025년, 당신이 더 내는 이자의 무게
이런 금리 격차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2025년 상반기 기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및 각 금융업권별 협회의 공시 자료를 교차 분석하면 '금융 가난세'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2025년 관련 데이터가 보여주는 경향성은 명확하다. 첫째, 신용점수가 낮아질수록 금리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역진적 상관관계가 확인된다. 900점대는 한 자릿수 금리가 가능하지만, 600점대는 15~20%에 달한다. 둘째, 같은 신용점수라도 어느 금융권역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금리가 현저하게 다르다. 750점대 중신용자가 은행을 이용하면 6~7%지만, 카드론을 쓰면 17% 내외의 이자를 내야 한다. 이는 금융 접근성이 취약할수록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함을 의미한다. 셋째, 저신용 구간(600점 이하)에서는 금리가 법정 최고금리인 20%에 사실상 수렴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이 격차를 실제 금액으로 환산해 '가난세'의 규모를 측정해보자. 만약 2,000만 원을 5년 만기 원리금 균등분할상환 방식으로 대출받는다고 가정해보자.
사례 A (고신용자, 950점): 제1금융권 이용, 연 5% 금리 적용.
5년간 총 이자 부담액: 약 264만 5000원
사례 C (저신용자, 600점): 제2금융권(저축은행/대부업) 이용, 연 19% 금리 적용.
5년간 총 이자 부담액: 약 1113만 4000원
A 대비 추가 이자(가난세): 약 848만원
같은 2000만 원을 빌렸지만, C씨는 A씨보다 무려 약 848만 원을 더 내야 한다. 이 848만 원이 바로 C씨가 자신의 낮은 신용점수, 즉 가난 때문에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가난세'다. 5년 동안 원금의 42%에 달하는 금액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것이다.
C씨는 A씨보다 매달 약 14만 원을 더 지불해야 한다. 저소득층에게 매달 14만 원은 생존과 직결되는 금액이다. 금융 가난세는 저소득층의 가처분 소득을 직접적으로 잠식하여 빈곤을 심화하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일상에 숨겨진 고금리의 덫: 카드론의 폭증과 리볼빙의 저주
가난세는 더 교묘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저소득층의 삶에 파고든다. 카드론(장기카드대출)과 리볼빙(일부결제금액이월약정)은 대표적인 사례다.
카드론: '시간 빈곤'을 이용한 착취와 위험 신호
카드론은 접근성이 높다는 이유로 많은 서민들이 급전 창구로 이용한다. 하지만 편리함의 대가는 혹독하다. 2025년 1분기 말 기준 9개 카드사의 카드론 평균금리는 연 14.83%에 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금리 상승기의 비용 증가가 취약층에 집중적으로 전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3월 기준 900점 초과 고신용자의 카드론 평균 금리는 11.89%였다. 하지만 700점 이하 저신용자의 평균 금리는 17.66%로 상승했다. 둘 사이의 격차는 5.8% 포인트 이상으로 벌어졌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카드론 이용 규모의 폭발적인 증가다. 경기 불황 속에서 2025년 1분기 단 3개월간 카드론 취급액이 무려 11조 원 넘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만큼 많은 서민이 고금리임을 알면서도 카드론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지표다. 시스템은 서민들의 '시간 빈곤'과 궁박한 사정을 이용해 빠른 대출을 미끼로 높은 미래 비용을 청구하고 있다.
리볼빙: '복리의 저주'와 정보 비대칭성
리볼빙은 더욱 위험한 함정이다. 카드 대금의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를 이월하는 이 서비스는 당장의 연체를 막아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월된 금액에는 평균 17~19%에 달하는 살인적인 고금리가 부과된다. 이는 사실상 대부업체 금리에 육박한다.
많은 소비자들이 정확한 이자율 구조를 인지하지 못한 채 이용하다가 '복리의 저주'(이자가 이자를 낳는 구조)에 빠진다. 2024~2025년 카드 리볼빙 잔액이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이 사실은 카드 대금조차 완납하지 못하는 가구가 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볼빙은 연체를 초고금리 부채로 전환한다. 이는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한 명백한 착취다. 이는 결국 '돌려막기'와 다중채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