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를 이용하기 위한 국제 조약은 거의 매 4년마다 개최되며, 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아태지역은 매년 준비회의를 하고 있다. 2003년 5월에 개최되는 WRC-03을 앞두고 아태지역 마지막 준비회의를 2월에 일본에서 할 때였다. 일본은 1주일간 하는 준비회의의 환송 만찬 때 일본은 새로운 위성 발사 계획이 있음을 공표하며 많은 국가들의 협조를 부탁한다는 일본 고위층의 인사말과 함께 참석자 300여 명에게 고급스러운 음식을 접대하였다.
만찬장에서 나는 일본 담당 공무원에게 어떤 주파수 대역을 사용할 계획인지를 물어 봤으나,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답변만 듣게 되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도 3개월 후에 개최될 국제회의에서 논의해야 하고 고위층이 나와서 각국 대표단에게 협조를 부탁한다는 인사말을 할 정도로 무르익은 계획인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 주파수 계획이 내부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답변이 의아하게 들렸다.
3개월 후 WRC-03 회의가 개최되는 날, 우리나라 대표단은 일본이 제출한 제안서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무선 인터넷(WiBro)이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하기 위해 2년여 전 부터 기술개발을 준비하고 있던 2.3GHz 대역을 일본이 위성으로 사용하겠다고 제안서를 낸 것이었다. 기술적으로 인접국가에서 위성을 사용하게 되면 주변 국가들에서는 위성으로부터 오는 전파 간섭에 의해 이동통신 시스템을 쓰기가 어렵게 되므로, 이러한 일본의 제안이 회의에서 승인되면 우리나라가 몇년간 추진해 온 사업을 원점부터 다시 검토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그날 부터 회의가 끝 날 때 까지 4주일 동안 일본, 인접 국가, 의장등과 본 회의 및 별도 회의를 10여회 하여 결국 일본이 다른 대역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왜 일본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알려주고 사전에 같이 의논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의 깜짝 제안이 의도적인이었던 것인지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는 확인 할 수 없으나, 회의 초기에 우리나라 대표단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매우 불쾌해 하였던 것이 기억된다. 주파수 사용의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것 보다는 4년여 기간 동안 매년 만나서 준비회의를 해 오며 사전에 우리나라에게 전혀 알려 주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과연 일본하고 성실한 협의를 해나가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극적 반전에 의한 흥미를 유발하지만 국제 협상에서는 상대방을 놀라게 하는 것보다 사전에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고 이어 내부적으로도 충분한 준비를 하여 협의를 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는 또 한번의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