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특별할것도없었지만
특별히 기념일이나 특별한 날을 챙기는 것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꽃이 예쁘게 피어나는 따사로운 봄은 생일이 있는 계절임에도 나는 봄이 유독 싫고, 아팠다.
누군가는 이제 그만 아픈 기억, 슬픈 기억에서는 벗어나도 된다고 했지만 차곡차곡 쌓인 기억이라는 녀석은 순간순간 내 마음속을, 머리속을 헤집고 들어와 여지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던 날, 3월 12일. 첫 손녀를 보러 시골에서 상경하신 할머니께서 별안간 뇌출혈로 돌아가시면서 나는 졸지에 할머니와 운명을 바꾼 몹쓸 손녀로 전락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경기를 하면서 숨이 넘어가고 병원에서는 아기를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때에도 엄마의 말로는 누구 하나 나서서 나를 살려보고자 말 한마디라도 곱게 건네주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는 탄생에 축복은 커녕 고모들의 원망과 작은아버지들의 한탄 속에 성장할 수 밖에 없었다. 매해 그맘때면 돌아오는 할머니의 기일과 내 생일은 어쩌면 내가 그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인연을 끊었던 순간까지 나를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그까짓 생일이 뭐 그리 대수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내 생일을 챙기지 않고 그 흔한 미역국 한번 먹어본 기억이 없다. 불우했던 가정환경은 어린시절부터 내 마음을 스스로 닫고 살게 만들었고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지낸다는 것을 넘어서 아빠와 딸 사이, 엄마와 딸 사이에 오가는 정이라는 것도 나는 느껴볼 수 없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관계였다고 생각했다.
몇번의 연애를 하면서도, 날마다 챙긴다는 기념일을 나는 잊어버리고 지나간 적이 많았다. 서로의 마음이 중요하지 며칠을 만나왔고, 뭐 그런것이 그렇게 중요할까 싶었다.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만년필과 책을 선물받는 것을 좋아한 나는 생전 처음으로 갖고 싶었던 것을 말한적이 있었다.
라미만년필이라고 브랜드 이름까지 친절하게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마음에 들었던 것을 찜 해놓고 있었는데 하필, 크리스마스 당일에 교보문고까지 가서 구입하게 하고 길바닥에서 두시간 이상을 차에 갇혀 꼼짝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그 만년필은 곱게 전해진 것이 아닌 나에게 던져준다며 준 것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졌고, 그걸 주워들어 만년필 환불하라고 하고 돌아서면서 다시는 어떤 누구에게도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후로 나는 만년필을 쓰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만년필도 모두 책상서랍에 방치되었고, 아마 지금도 어딘가 서랍속에 몇자루가 고이 모셔져 있을 것이다.
나 만큼이나, 우리 딸도 아이들이라면 흔하게 장난감 사달라 뭐 사달라 조를 나이에도 한번을 갖고 싶은것을 사달라고 떼를 쓴 적이 없다. 요즘 아이들은 스스로 요구하기 전에 부모들이 알아서 하나하나 챙겨주기 때문에 사달라고 조를 이유가 특별히 없는 것도 이유이긴 한 것 같다.
누군가에게 받는 마음의 배려가, 온전한 그 마음인채 다가온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기념일을 특별하게 챙기는것도 누가 내 기념일이나 그런 특별한 날을 챙겨주는 것도 익숙하지않다.
그냥 불편하다. 이 글을 지난 크리스마스에 쓰다가 숨이 막혀 서랍에 저장해 두었는데 마무리를 이제서야 하고 있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매번 이런 내가 극성스럽다고 했었다.
그냥 마음이니까 주고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 편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나는 이상하게 온 몸으로 마음으로 말로 거부감을 강하게 드러냈었다. 생일이라 밥을 먹든, 크리스마스나 기념일이나 밥을 먹든 뭘 하든 그 당일은 지나서 보자고 하면 뭔가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가슴이 답답해져 그렇다는걸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축복속에 태어나 성장할 수 없었지만, 나는 기념일따위 없어도 될만큼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렇게 보란듯이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마음 다치지 않는 방법은 그 상황을 그냥 피해버리면 될 때도 있다는걸 나는 경험으로 알게되었다.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가면서 내가 싫은 이들과 나를 싫어하는 이들과 부대낄 필요가 없다.
웃으면서 좋은 생각만 하면서 살기에도 시간은 너무 짧고 빨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