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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Apr 04. 2020

#05-1 주먹을 부르는 주먹고기와 퇴사 도전자

실패할 줄 몰랐던 퇴사 도전자

마음 먹었지만 몇 달을 끌었다. M은 간간히 내게 왜 퇴사하겠다는 말을 못 하냐며 답답한 심정을 쏟아내면, 갑자기 단행본 제작을 맡게 됐고 심신은 건강하지 않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렇게 됐다고 둘러댔다. 의도치 않게 두 달, 세 달이 지났고 결국 상반기를 넘겼다. 실제로 바빴다.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단행본 교정교열에만 힘 쏟았다. 저자와 만나고 교정보고, 반영하고. 물론 출근은 하지 않았지만 재택근무와 다름없었다.



휴가 내내 단행본을 만들었고, 다음 달 잡지를 만들었고, 그다음 달 책을 출간했다. 단행본 제작이라고는 눈곱만큼의 과정도 몰랐지만 외부 기고자였던 관련 업계 사람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들어가며 책을 만들었다. 수년간 출판사 보도자료를 읽었던 것을 바탕으로 보도자료를 만들었고, 책의 특성상 독자들이 직접 자신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저자의 요청을 맞춰 만들기도 했다. 보도자료는 온갖 기자들과 출판사들에게 돌렸다. 이 모든 업무를 다 수행하면서 잡지를 만들었으니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손가락까지 건초염이 생겨 양 검지에 깁스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됐고, 교정지를 폐기했다는 이유로 저자의 항의가 들어왔고 대표는 퇴근하는 내게 전활 해 온갖 소릴 퍼부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 똑바로 안 하냐는 말에 그나마 버티고 있던 몸과 마음이 무너졌다. 이건 아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스스로를 사지에 몰아붙인 내가 너무 싫었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니 빨리 자자,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 애니메이션 한 편만 보고 자자 등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이명이라도 온 듯 그렇게 며칠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표에서 퇴사하겠다는 말을 처음 꺼낸 건 '일 똑바로 해'라는 대표의 말을 듣고 이 주 후였다. 충동적이었다. K와 K의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에 버스에서 묵혀둔 일을 K에게 풀어놓다가 바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마 메시지로 퇴사 얘길 꺼내고 싶지 않았다. 도의적으로도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런데 대표는 전화를 받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하겠다는 말을 메시지로 전했다.



 대표님 제가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언제나 잘 대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10분 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대표에게 답이 왔다.


 안 돼.



 드립 커피를 잔뜩 마신 것처럼 심장이 뛰었다. 몸이 붕 뜬 것처럼 떨렸다. 이건 무슨 말이란 말인가. 퇴사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인가? 대표에게 안 된다는 답이 왔다는 말에 K는 몹시 당황하다가 자지러지듯 웃었다.



“언니는 퇴사도 마음대로 못하네요. 하하하.”


“익숙해. 하하하.”



 물론 대표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안 된다는 말을 시작으로 많이 힘드냐, 내일 다시 얘기하자는 등의 메시지가 왔다. 우선 알겠다고 답하고 K와 K의 남자 친구를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프라인으로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며 기다리는 게 신경 쓰였다. 우리는 익선동에 있는 고깃집에 들어갔다. 익선동에서 가장 인파가 몰리는 거리를 조금 벗어나면 허름한 주먹 고깃집이 몰린 구역이 있다. P와 사귀던 3년 전, 그때 P의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던 가게다. 엉덩이 붙일 곳이라고는 거기밖에 없었다. 분위기 좋고 조용한 곳에 가고 싶었지만 익선동에는 그런 가게가 없었다.



K의 남자 친구는 나와 P의 교육원 동기다. 어디 하나 모나지 않은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며 P가 내게 주선을 제안했고, 몇 달을 미룬 끝에 둘의 소개팅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K의 남자 친구가 내게 K와 사귀기 시작했다고 새벽 댓바람부터 연락이 왔다. K의 남자 친구는 이 일로 K에게 호되게 혼났다. 새벽 댓바람도 댓바람이지만 자신은 회사 선배들인데 자신에게 말도 없이 그걸 쪼르르 달려가서 말했냐며 혼을 냈다고. 사귀자마자 바로 혼 나는 남자는 처음 봤다. 어쨌든 K의 남자 친구는 내 지인이기도 해 내게 걱정 어린 말들을 건넸다. 고기도 시키지 않고 한동안 말이 계속됐다. 이 정도면 잔소리였다.



“잔소리 그만하시고요. 우선 주문부터 하자. 배고파.”



내 말에 K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 고기를 주문했다. 뜨거운 숯불이 나왔고 그 위에 철판이 놓였다. 숯불 열기가 그대로 얼굴에 스며들어 후끈거렸다. 사람은 셋인데 고기는 4인분이다. 그래, 배 터져 죽자.



“그런데 소주는 안 시켜? 나 소주 마시고 싶은데,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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