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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Sep 25. 2023

순간의 진심으로, 영화 [비밀의 언덕]

비밀의 언덕에 올라 과거의 나에게 편지를 바친다

<비밀의 언덕리뷰 비밀의 언덕에 올라 과거의 나에게 편지를 바친다

     

며칠 전, 친구와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을 떠올리면 지금보다도 거짓말을 더 자주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도를 찾지 못할 정도로 사소하고 이제 보니 우스운 그런 거짓말들이었다. 우습고 가볍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르는 나의 어릴 적 거짓말들은 따지고 보면 참 그 순간을 무마하기 위한 어리석은 장치였다.


지금도 거짓말을 한다. 


여전히 명은처럼, 명은의 오빠 민규처럼, 담임선생님 애란처럼, 교장선생님처럼. 우리는 일상의 순간순간 나를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두둥실 비밀을 만들며 언덕을 쌓는다. 그리고 열심히 쌓은 그 언덕을 우린 수없이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한다. 


여기 인생의 첫 '비밀의 언덕'을 올라간 명은이 있다.

<비밀의 언덕> 스틸컷

명은이 비밀의 언덕을 쌓기 시작한 첫 순간은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아버지 직업을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이다. 


선생님의 책상에 놓인 종이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종이 만드는 회사의 회사원이라고 답한 명은의 말에 관객들은 놀랐을지도 모른다. 순수한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직접 본다는 건 그리 편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몰래 훔쳐본 듯한 마음에 마치 나의 치부마저 들키는 기분이다. 영화는 그 순간 불편한 마음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들여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들춰본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순간순간의 진심이 거짓말로 승화되기도 하던 어릴 적과 극장에 앉아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지금의 나를 동시에 떠올린다. 

   

<비밀의 언덕> 스틸컷

쌓이고 쌓인 순간순간의 진심들을 짊어지고 명은은 자신이 쌓은 첫 '비밀의 언덕'을 오른다. 그 언덕에 올라 '손녀로부터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적어 내려가는 명은. 그 순간 영화는 ‘고백’이자 ‘해소’ 같은 명은의 편지를 내레이션으로 한참의 시퀀스와 함께한다. 명은의 눈으로 바라본 가족들의 모습에 관객은 함께 그 편지를 쓰듯 시간을 훑는다. 하늘에 계신 할머니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고 고백하며 <손녀로부터 온 편지>를 쓰는 명은은 언덕에 올라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듣기 좋은 말로 원고지를 채우던 명은이 누구보다 솔직하게 그 순간의 진심을 써 내려가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언제라도 자신의 말로 글을 쓸 수 있었던 명은을 발견한다. 언제라도 쓸 수 있었던 명은의 진심은 순간순간의 ‘숨기고 싶은 진심’으로 바뀌기도 하며 성장하고, 다시금 비밀의 언덕에 올라 자신의 숨겨진 진심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 순간 명은은 <손녀로부터 온 편지>를 고이 흙에 묻는다. 우리의 치부를 명은 앞에 들춰내려던 순간, 명은은 먼저 그 자신의 진심이 담긴 글을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묻어둔다. 우리도 지금은 어디다 묻었는지 알지도 못할 장소에 다시 우리의 마음을 묻어둔다. 우리 모두, 그렇게 비밀의 언덕을 오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살고 있다.

<비밀의 언덕> 스틸컷

명은의 진심을 묻으면서 영화는 '성장'한 명은을 조명한다. 여기서 영화는 자신의 가정사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진정한 '나'를 보이는 그런 정직한 모양새보다는 새 학기를 맞는 명은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택한다. 새 학기를 맞아, 어김없이 가정환경조사서를 내는 날, 명은의 새 담임선생님은 그 가정환경조사서 종이를 그대로 뒤집어 자기 자신에 대해 자유롭게 써보라고 한다. 선생님의 말을 들은 명은의 얼굴에서 영화가 비로소 보여주고자 했던 명은을 보게 된다. 책상 서랍 속 가지런히 정리된 색연필까지 꺼내 야심 차게 자신만의 종이를 만들어가는 명은의 표정을 보다 이내 미소 짓는다. 명은의 표정만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로 종이에 무엇을 써 내려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의 표정에 묻어나는 생동감에 해방감을 느낀다. 명은이 느꼈을 그 해방감을 우리도 깊게 공유한다. 


살면서 이렇게나 문득 찾아오는 해방감을 명은이 기억하길, 우리 앞에 자주 놓이는 무력감보다는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해방감을 기억하자고 명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 편지를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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