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옆에는 노적봉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노적봉에는 뻐꾸기와 꿩이 둥지를 틀고 봄이 오면 진달래가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산 아래로는 노송이 우거져 있다.
몇 해전까지만 해도 그곳에는 무당 집이 있었다. 그러나 산 옆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무당 집은 허물어졌고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노송이 우거진 사이로 으스스하게 잡초가 무성한 이곳에서는 간혹 드라마 촬영을 한다.
얼마 전에도 이곳에서 촬영이 있었다. 소복을 한 여인과 귀신이 등장하는 촬영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나는 이곳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을 때마다 구경을 하러 간다. 드라마 촬영이 있을 때마다 처음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지마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새벽 무렵이 되어서는 구경하는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다. 제작진들은 촬영을 하다가는 빵과 우유로 간식을 먹는다. 그들이 간식을 먹을 때마다 나의 행동은 부자연스럽다.
구경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인사치레로 하나쯤 먹어 보라고 권할 법도 한데 자기들끼리만 먹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여 그들이 간식을 먹을 때면 잠시 자리를 피하곤 했으나 이제는 아예 드라마 촬영이 있을 때마다 먹을 간식을 준비해 간다.
이렇게 드라마 촬영하는 장면을 즐기는 까닭은 드라마가 제작되는 과정이 흥미롭고 또 유명연예인을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라마 촬영하는 자리에 자주 다니다 보니 어떤 때는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공상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공상에 빠지곤 하던 내가 얼마 전 텔레비전에 출연할 뻔한 일이 있었다.
방학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배낭을 메고 설악산엘 갔다. 계곡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내고는 새벽에 설악산을 올랐다. 소나기를 맞으며 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낙산 해수욕장을 찾았다.
전날 텐트에서 고생한 우리는 해수욕장 부근에 민박집을 구하고 해변으로 나서는데 마침 그곳에서 드라마 촬영이 있었다. 나는 동료들을 구슬려 드라마 촬영하는 장면을 보러 갔다. 많은 제작진들이 조명기구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탤런트들이 분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라도 카메라 가까운 곳에 있다 보면 내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올 수도 있겠거니 하여 어린아이처럼 카메라 앞에서 기웃거렸다.
그렇게 한참 드라마 촬영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감독이 엑스트라쯤으로 보이는 한 여자 탤런트에게 구경하는 남자 중에서 아무나 한 명을 골라 팔짱을 끼고 해변을 걸어가라는 것이다.
주연급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캠프파이어를 하는 장면 너머로 한 쌍의 연인이 해변을 거니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감독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같이 팔짱을 끼고 해변을 거닐 상대자를 찾으려 하였으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소 선생이 내 등을 밀치며
"여기 멋진 사람 있어요!"
소리치자 그녀는 반가운 듯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소 선생 덕분에 텔레비전에 출연하게 된 것을 즐거워하며 그녀와 함께 해변으로 가려는 순간 갑자기 감독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지금 불륜 장면 찍으려고 하는 거야! 다른 사람으로 바꿔!"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으로 상대자는 바뀌었고 난생처음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문화 센터에서 방송국에서 우리들이 강의를 듣는 장면을 촬영한 일이 있었다. 카메라맨은 교수님의 인터뷰 장면에 이어 수강생들의 모습과 작품을 발표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 후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그 장면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여 텔레비전을 보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아내에게도 내가 텔레비전에 나올 것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그 장면은 나오질 않았다. 그 후 일주일쯤 지나서였다.
아침 일찍 출근하기에 앞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그 장면들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밥을 먹다 말고 아내에게 내가 곧 나올 것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교수님의 인터뷰 장면에 이어 수강생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장면과 강의를 듣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동안에도 내 모습이 곧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카메라맨이 촬영을 할 때 그쪽으로 유심히 몸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내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송이 거의 끝나갈 무렵 수강생들이 강의를 듣는 장면과 함께 팔 하나가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등뒤에서 찍은 장면인데 옷의 모양을 보아서 그것은 틀림없는 내 팔이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같이 보고 있던 아내를 향해
"저거 내 팔이야! 내 팔이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아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비록 한쪽 팔 일부가 화면을 슬쩍 지나쳤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여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뉴스 시간에 내 팔이 텔레비전에 나왔으니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