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 선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을 인솔하여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으로 여행을 떠났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줄을 지어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남학생 수십 명이 기념관 운동장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놀라서 아이들 뒤를 쫓아가 보니 예산에서 수학여행을 온 남학생 서너 명이 운동장 한쪽에 쭉 뻗어있었다.
사태를 파악하니 그 학교 남학생들이 우리 학교 여학생들을 희롱해서 그랬다는데, 녀석들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지 불과 몇 분 후, 독립기념관 운동장 한가운데서 그쪽 아이들 수백 명과 우리 학교 수백 명의 남학생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다.
돌멩이가 날아다니고, 각목으로 치고받고 하는데 도무지 말릴 재간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 참 후 경찰력 2개 중대가 동원되고서야 겨우 싸움은 수습되었다.
아이들 졸업을 앞두고 간 여행은 관람조차 못 한 채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해 가을, 수학여행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학교 인근에 있는 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몇몇 녀석들이 담배를 피우다가 산불을 내고 말았다. 산불을 끄느라 소풍은 엉망이 되고 산 아래 있는 절에서 스님이 와서는 산불을 냈다고 어찌나 다그치던지 잘못했다고 빌고는 그 이듬해 그 산으로 나무를 심어주러 가야 했다.
나는 정년퇴직을 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16년, 선생의 신분으로 36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그 오랜 학교생활을 돌이켜보면 처음 부임해서 5년 동안 상업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교실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책상에 엎으려 있었다. 한 시간 수업이 끝나면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교문 밖으로 도망을 치고, 또 한 시간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이 도망을 쳤다.
그렇게 학교 밖으로 나간 아이들은 오토바이를 절도하고, 산속에서 텐트를 치고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자정이 되어서까지 아이들을 잡으러 산속으로 다녀야 했다. 아이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붙잡아오면 하숙집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같이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내가 무슨 교사로서의 사명감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결석하면 교장 선생님은 교사들에게 경위서를 받고 직원 조회를 할 때마다 호통을 쳤다.
경위서를 쓰기 싫어서 아이들을 붙잡으러 다녔다. 아이들이 납부금을 내지 않으면 월급에서 공제했다. 교무실 한가운데는 보험회사처럼 아이들이 등록금을 얼마나 냈는지 반마다 그래프가 날마다 그려지고, 그래프가 높게 올라가지 않으면 경위서를 쓰고, 그러다가는 사표를 강요했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은 납부금을 받으려 가정방문을 하기도 했다. 학교장의 눈에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돈으로 보였고, 그러니 아이들이 결석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그 시절, 아이들은 가출하고, 틈만 나면 이웃 학교 아이들과 싸움을 했다.
그 중심에는 늘 석근일이가 있었다. 녀석의 차가운 눈빛을 바라보면 등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녀석이 어느 날 등교를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께 연락하니 가출을 했다는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가출을 했으니 걱정되었다.
나는 그날부터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녀석을 찾으러 다녔으나 도무지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 달 남짓, 피시방에서 녀석을 겨우 찾았다. 학교 다니기 싫다는 녀석을 겨우 달래어 등교를 시켰다.
그런데 며칠 후 하굣길에 대여섯 명의 청년들과 시비가 붙어 그들의 얼굴을 맥주병으로 쑤시고 말았다. 소년원으로 송치된 근일이를 그 후로는 만나본 일이 없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 학교를 떠나 서울에 있는 여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퇴근하려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선생님, 저 근일인데요.”
녀석의 전화를 받고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동안 통 연락이 없던 녀석이 불쑥 전화한 것이다.
주례를 서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면서 퇴근길에 아이들을 보내겠다고 한다.
자리를 정돈하고 교문을 나서는데 청년 서너 명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김지영 선생님 아니시냐고 한다.
그들의 안내로 길가에 세워진 승용차를 타고 신촌 뒷골목에 다다르자 나를 한 일식집으로 안내했다. 거기에 근일이가 있었다.
“선생님, 그동안 연락도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은 녀석의 옆에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나는 녀석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지내온 이야기를 들었다.
며칠 후 녀석의 주례를 서기 위해 예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로에 있는 예식장엔 하객들로 가득 찼다. 단상에 올라가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없다. 단지 기억에 남는 것은 주례를 서고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검은색 양복을 입은 거구의 청년들이 이 열 종대로 서서 나를 피로연 장소로 안내를 하는 것이다.
그 후 나는 서너 번에 걸쳐 그와 유사한 주례를 섰다. 근일이의 예식에 참여했던 하객들이 나에게 연거푸 주례를 부탁했고, 나는 조폭 주례 전문가가 되었다.
퇴임을 며칠 앞두고 덩치 큰 중년의 사내 열댓 명이 교무실 복도를 거쳐 교무실로 들어왔다. 아이들도 놀라고 교무실에 앉아 있던 선생님들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화들짝 놀라는데, 그 사내들이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교무실 바닥에 엎드려 큰절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님!’
하면서 나를 부둥켜안는데,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독립기념관 운동장에서 펄펄 날던 녀석들의 모습은 여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