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항상 제자리에 있다
목적이 없는 사람은 방향타 없는 배와 같다고 한다. 학창 시절 진로를 적는 빈칸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쓸 수 있는 말이 없는데 매번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그때는 참 이상했다. 내 빈칸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희망사항이거나 혹은 그럴듯하게 끼워 맞춘 것들로 가득했다. 고등학교 3학년쯤 되니까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불안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미래를 위한 계획이라던가 공부 같은 것들은 여전히 귀찮고 어려웠다. 그리고 그 해 여름에 처음으로 보게 된 작품이 언어의 정원이었다.
당시의 내게 다카오는 '이상' 그 자체였다. 끊임없이 도전하며 나아갈 수 있는 목표가 있었고 자신의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은 뜨거운 욕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상대가 곁에 있었다. 그 속에서 발견한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 조각처럼 보였다. 우산을 쓰는 날에만 만날 수 있는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스스로 완전히 드러낼 수 있는 만남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더욱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눈을 즐겁게 하는 감성적인 뒷 배경과 어우러져 모니터 바깥이 아닌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반대로 유키노는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거대해서 남아있는 시간을 좌우하기도 한다. 과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있는 모습이 당시의 나와 무척 비슷했다. 막연하게 다카오보다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다가 영화 후반에서 미래를 바꾸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모습은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다. 걸어갈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시간이 한탄스럽지만, 동시에 이를 바꿔야겠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나에게 쓴 충고를 해주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여름의 장마철이 되면 이제는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두 사람이 떠오른다. 다카오와 유키노는 부족했던 부분들을 서로 의지하며 성장한 것도 있지만, 만남 이후에 그들의 인생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작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지나간 과거에 사로잡혀 후회만 반복했지만, 이제는 일단 한 걸음부터 내딛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