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축구기자의 꿈을 안고 독일로 향한 나는 교환학생으로서 공부를 하면서 유럽통신원으로도 활약했다. 유럽에서 직접 축구를 보고 느끼며 생생한 소식들을 많이 전했다. 유럽 인기 리그와 스타들, 국가대항전 등에 대한 뉴스를 부지런히 국내 언론사로 보냈다. 특히, 국내에서는 정보가 많지 않았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와 UEFA컵(현재 유로파리그), UEFA 랭킹(country 랭킹, team 랭킹) 산정 시스템 등을 공부하고 기사로 쓰면서 독자들과 잘 소통했다. 그렇게 약 1년을 정말 열심히 뛰었다. 사비로 경기장을 찾아 취재를 하고 하루 평균 6시간 이상 PC방을 옮겨 다니며 글을 쓴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글을 보내던 언론사에서 정식기자로 활동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듬해 늦여름 교환학생 일정을 마무리 짓고 국내로 복귀해 꿈에 그리던 언론사 기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와 기자 생활하면서 다양한 분야를 취재하게 됐다. 기자로서 기본이 부족했던 터라 일종의 '특별 수업'을 받았다. 스포츠 외에도 정치, 경제, 사회, 연예, 편집 등을 돌아가면서 맡았다. 많이 힘들었다. 잘 알지 못하고 흥미도 별로 못 느끼는 내용들을 기사로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자 초년병 시절 대부분이 겪는 어려움 속에 갇혀 지칠 때가 많았다. 만화가, 포르노책 저자, 신 개념 대학축제 등 생소한 주제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해 글을 쓰면서 선배들에게 많이 혼났다.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미진한 결과물에 대한 지적과 비판에 자신감이 크게 떨어졌고, 축구 및 스포츠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축구'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선배들의 눈치를 봐 가면서 잡지에 기고도 하고, 방송에 출연해 해설도 하면서 경쟁력을 키웠다. 언젠가는 축구기자로서 빛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조금씩 전진했다.
사실, 꿈과 현실이 달라 보여 기자를 포기하려고 했던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정말 좋아하는 취미를 직업으로 삼은 데 대한 후회와 함께 다른 직종을 살펴보고 면접까지 보기도 했다. 최종합격 통보를 받아 지방으로 갈 짐을 다 싸놓고 차편까지 예약했지만,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지금도 친한 지인들은 "훨씬 더 조건이 좋았던 곳으로 떠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없냐"고 종종 물어본다. 나는 항상 곧바로 "전혀 없다"고 답한다. 그때 이직을 했으면 현실과 타협해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 같다. 자유롭게 글을 쓰고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자라는 직업의 매력을 느낄 수 없었을 게 분명하다.
당시 축구에만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서 나를 도운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유럽통신원 시절 룸메이트였던 중국계 스페인친구 장(chan)이다. 그는 독일 베를린의 한 기숙사에 함께 살다가 친해진 녀석이다. 나보다 열 살가량 어리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이 엇비슷해 매우 친하게 지냈다. '베컴 장'이라고 불린 친구는 공도 매우 잘 차고 축구 지식도 해박했다. 장과 함께 베를린에 모인 각 나라의 학생들과 편을 나누어 '나만의 월드컵 미니게임'을 즐기는 게 유학생활의 또 다른 낙이었다. 그렇게 장과 꾸준히 같이 축구를 하고 몇 달 동안 함께 살면서 축구이야기를 하니 자연스럽게 독일어 실력은 한층 향상됐다. 유럽축구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도 높아졌다. 나로서는 장덕분에 독일어도 축구도 모두 다 잡을 수 있었던 셈이다.
기자가 된 후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에 장과 자주 MSN 메신저로 축구 이야기를 하면서 갈증을 풀었다.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늦은 시간에 인터넷에 접속해서 '축구 수다'를 떨었다. 마치 여자 친구와 사랑이야기를 나누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축구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취재 파트가 넓어져 스포츠 기사를 다시 쓸 수 있게 되면서 장이 현지에서 전해주는 소식들을 활용해서 간간이 살아 있는 유럽축구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유로 2004라는 큰 대회를 맞아 특별팀에 포함되어 밤과 낮을 바꿔 신나게 일할 기회를 잡았다. 매일 밤을 새워 경기를 보고 리뷰, 프리뷰, 분석 기사들을 쏟아냈다. 즐기면서 쓰는 기사들은 빠르고 날카롭고 신선했다. 장은 현지 정보통이자 통신원이 되어줬다. 대회 이후 나는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회사 내에서 주는 상을 거머쥐었고, 다음 해에 스포츠팀장이 되었다. 그렇게 스포츠 쪽에 집중하면서 축구 소식들을 더 열심히 전하게 됐다.
2005년 이른 여름 어느 날. 유럽리그가 모두 끝나고 이적시장이 열릴 즈음 장이 MSN 메신저를 보내왔다. 전기 분야를 전공했던 그는 영국 맨체스터에 박사 과정 공부를 하러 갔다고 전했다. 어린 나이에 5개 국어를 할 정도로 똑똑한 친구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런데 장이 갑자기 박지성에 대한 질문을 꺼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함께 봤던 21번(박지성의 한일 월드컵 등번호)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로 온다는데 맞나?" 나는 이런저런 이적설이 많은 시기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짧게 말했다. 그것으로 박지성의 맨유 이적설 이야기는 바로 끝났다. 이어서 나의 기자생활, 장의 맨체스터 공부 진행 상황 등을 묻고 답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일상적인 수준으로 마무리 됐다.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박지성이 진짜 맨유로 이적하게 되었다.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PSV 에인트호번을 4강 고지로 이끈 박지성이 맨유 유니폼을 들고 '깜짝 옷피셜'(옷+오피셜, 클럽 유니폼을 들고 사진을 찍어 이적을 인증하는 것을 일컫는 신조어)을 전해 왔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그였지만 세계 최고 클럽 가운데 하나인 맨유행이라니. 당시 맨유는 현재 '레·바·뮌'(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이상으로 평가 받는 최강 중의 최강 팀이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아쉬운 탄식과 함께 주먹으로 무릎을 탁 쳤다. '그때 장이 말한 게 사실이었구나!' 기자로서 단 한번 잡기도 어려울 대특종을 놓치고 말았다. '낙종'이었다.
이후 장과 박지성의 이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를 탓했다. 나는 "왜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해줬나"고 장에게 따졌고, 장은 "이야기를 했는데 못 알아들은 건 너다"라고 나를 나무랐다. 어쨌든 유럽 '현지축구박사'의 말을 안 믿은 내가 바보라고 느끼며 아쉬움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리는 2002년 독일에서 한일 월드컵을 같이 보면서 박지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한국의 21번 선수가 정말 잘하는 것 같다. 진짜 미친 듯이 뛴다. 누구냐"는 장의 질문을 시작으로 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플레이 스타일, 장단점 등을 말하며 거의 밤을 새웠다. 어쨌든, 맨유 이적 후 박지성은 우려를 딛고 맹활약을 펼쳤다.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라이언 긱스같은 대스타들과 함께 당당히 맨유의 주축 멤버로 자리매김 했다. 나는 방송에서 박지성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관련 기사를 쓰면서 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2007년 초반 한 국내출판사의 제안을 받고 책을 쓰게 됐다. 박지성을 영입해 맨유를 더 강한 팀으로 만든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대한 내용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맨유 매거진'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던 터라 제안이 왔던 것 같다. '솔직히 경험도 적고 필력도 한참 모자라는 내가 책을 쓸 능력이 될까'라는 생각이 바로 머리를 스쳤다. 고민 중에 또다시 장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맨유 관련 책을 쓰게 됐는데 도움을 좀 줄 수 있나." 장은 바쁜 와중에도 여러 정보가 담긴 URL(인터넷 호스트 주소)과 해외 서적 등을 추천해줬다. 역시 내가 인정하는 유럽축구박사의 정보는 확실했다. 국내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특별한 내용들을 잘 활용해 책을 구성했다. 그렇게 2007년 5월 '퍼거슨 리더십'이라는 책을 완성했고, 글 내용 가운데 '박지성 맨유행 낙종' 이야기도 담았다. 장에 대한 큰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 어느덧 2019년이 됐으니 나도 기자를 시작한 지 18년이나 됐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과연 '지금 시대에 박지성 맨유행 같은 정보를 알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인터넷을 넘어 모바일로 기사를 쓰고 보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공유가 순식간에 확산되는 현재, 이런 고급정보를 알게 됐다면 곧바로 집중해 더 깊숙이 취재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2000년대 중반에 유럽 현지에서 보내준 특급 정보를 흘려들은 게 다시 한번 진한 아쉬움으로 남지만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특종은 부지런한 발, 낙종은 게으른 발이 낳는다는 말이 결코 틀린 게 아니다.
그래도 '박지성 맨유행 낙종' 경험 덕분에 현지 팬의 반응과 SNS 정보 등을 다각도로 더 귀담아 듣는 버릇이 생겨서 다행이다. 언젠가 사수에게 배웠던 기자의 가장 큰 자산은 호기심과 무모한 도전이라는 사실을 '박지성 낙종'으로 다시금 알게 됐다. 어찌 보면, 요즘 기자 세계에서 대세로 자리 잡은 '디지털 마인드'의 교훈을 '박지성 낙종'으로부터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콘텐츠 홍수시대 속에서 독자들이 기자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감하며 정보에 대한 레이더망을 항상 전방위에 세워두고 있다. 인터넷이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소식통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그런 자세를 기본으로 현재 회사에서 스포츠와 함께 뉴미디어 쪽 부서장도 맡으며 콘텐츠 개발에 힘쓰고 있다.
몇 해 전 장과 주로 이야기를 나눴던 메신저 사용이 국내에서 불가능해지면서 연락하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메일로 가끔 안부를 전했는데, 최근에는 그 기억도 거의 없다. 지난해 현재 몸담고 있는 매체로 이직을 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일에 적응하면서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장 이 녀석은 여전히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까. 그리고 아직도 축구에 미쳐 있을까. 나는 지금도 기자 생활을 하고 있고, 수술 후유증으로 무릎이 아파서 절뚝거리며 잘 걷지 못하면서도 공을 차러 나갈 정도로 축구에 미쳐 있다. 유럽통신원 시절 맺은 장과 인연 및 경험이 기자로서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느낀다. 오랜만에 나의 '축구 절친' 장에게 연락을 보내 본다. 'scheisse, wie gehts?'
* scheisse, wie gehts? : 샤이쎄, 비 게츠 - 독일어 '샤이쎄'는 영어 '시트'(shit)처럼 욕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친한 사이라 거리낌 없이 쓴 말이다. '비 게츠'는 잘 지내는지 묻는 인사말. 종합해서 요즘말로 의역하면, '닥치고 잘 지내냐?'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