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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Nov 07. 2023

노견이 사료를 안 먹어요

열네 살 견생 최초의 사태

 우리 개는 원체 아무 거나 잘 먹었다. 각종 브랜드 사료는 기본이고 채소과일도 잘 먹고 옥수수, 고구마 등 구황작물도 가리지 않았다.

 강아지 때는 내가 반찬 하다 떨어뜨린 생두릅을 너무 맛있게 주워 먹어서 한때 '두릅'이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했다.

 아무튼 개가 사료를 안 먹는다는 말은 애견 쇼핑몰 개사료 고객후기나 반려견 예능프로그램 고민 사연으로 보던 것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것들을 몰래 주워 먹을까봐 감시하느라 집중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벌써 먹고 없어야 할 급식기 그릇에 저녁밥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얘가 밥이 나온 걸 몰랐나 싶어 밥 먹자고 유인했는데 터덜터덜 와서 냄새만 맡더니 고개를 돌려 가버렸다.


 처음 있는 일이라 가슴이 철렁했다.

안 먹을란다





 이 상황을 가족톡에 알리니 난리들이 났다. 잘 먹는 과일채소 퇴근길에 사가겠다, 물에 한번 불려 줘 봐라, 내가 당장 습식사료를 주문하겠다......

 사료를 안 먹는 것 외에 배변 상태나 컨디션은 좋았고 다른 것들은 다 여전히 잘 먹었다. 그래서 당근, 사과, 양배추, 무를 썰어 저녁으로 줬다.

 최애 과일인 사과를 꺼낼 때는 평소와 똑같이 빨리 달라고 흥분해서 짖으며 내 종아리를 때리기도 했다.

 여기저기를 관찰하다 배를 만져보니 좀 빵빵한 듯 해서(늘 빵빵하긴 하지만) 저녁 산책도 나갔다. 산책길에서의 패턴도 똑같아서 노견에게 별다른 이상증상은 없었다.


 단지 여태 잘 먹던 사료 안 먹는 것뿐이었다. 사료 배출 시간이 되면 급식그릇에 쌓이기도 전에 다 먹던 아이였는데 알 수가 없었다.

 문득 사료를 바꾼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난 1주일 동안 별 일 없이 잘 먹었는데.

 우리 개는 신장결석이 있어 결석처방사료를 먹는데 이번에 똑같은 브랜드지만 다른 사료를 샀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 기관지에서 컥컥 소리를 내는데 수의사선생님이 살이 찌면 증상이 더 할 거라고 하셔서 늘 먹는 결석처방사료에다 추가로 저칼로리라는 사료를 샀던 것이다.

 

 그래도 사료를 바 일주일쯤 후부터 안 먹는다면 사료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남편은 노견의 이가 부실해져서 사료를 씹기가 불편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추측하였다. 사료를 갈아서 줘 보고 물에 불려서도 줘 보자고 했다.

 잘 안 쓰는 수동 커피그라인더에 홀빈 사료를 넣어 갈아니 먹는다. 또 물에 적셔 살짝 불려 줘도 먹는다.

 역시 노견의 입장에서 바꾼 사료를 먹기가 불편했던 건가. 

 주방용 핀셋으로 사료 한 알을 집어 눌러보니 내 손가락 힘으로 부서뜨리 어렵게 단단하다.

 얘가 이제는 딱딱한 사료를 먹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구나.


 이것이 현실이다.

가족톡의 8할은 개 이야기





 그 날이후 밥을 줄 때 사료를 먼저 물에 살짝 불리고 노견이 좋아하는 채소과일을 랜덤으로 다져서 섞어 준다.

 남편이 주말 동안 사료를 미리 많이 갈아두어서 성질 급한 개르신 식사 준비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밥그릇도 도자기로 바꿨다. 내가 개 밥 주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편하게 자동급식기를 이용했던 건데 우리 집 자동급식기는 습식사료를 사용하지 못하니 당분간은 아침저녁 시간밥을 챙겨야 한다.


 '불린 사료와 최애 채소과일 믹스 밥'은 고개도 한번 안 들고 순삭이다. 당근이나 사과, 양배추 같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들도 못 먹게 되는 날이 오겠지만 그때는 또 그때 가서 해결하기로 한다.  

사료+당근+배추, 맛의 조화는 책임 안 짐

   


 우리 노견의 생애 최초 사료 거부 사태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아주 어린 강아지들은 사료를 잘 씹지 못하기 때문에 물에 불려 부드럽게 만들어 급여한다. 

 늙으면 애기로 돌아간다는 말이 사람에게만 맞는 건 아니구나 싶다. 

 

 아직도 얼굴은 청년인데 실상은 단단한 사료를 먹기 싫어하는 열네 살 노견이라니 역시 개나 사람이나 겉모습보다 몸속이 중요한 것이다.

 얼굴은 나이보다 열 살 젊어 보이는데 혈관 나이, 뼈 나이, 오장육부 나이가 할머니인 여자보다는 그 반대가 훨씬 나을 것 같다.

 처음으로 노견과 함께 살며 배우는 게 많다. 


  할버지, 부실한 이도 잘 닦아 드릴게 건행하세요.

뭐 먹을 거 줄 거야?라는 표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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