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교육원 개강날
사춘기 자녀가 가수가 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면? 정신 차리라고 야단치고 공부가 제일 쉽다고 설득하는 대신 혹독하게 가르치는 보컬학원에 등록해 준다. 결국 해낼 떡잎이라면 버틸 테고 그렇지 않은 녀석은 스스로 포기할 것이다. 가수를 만들어준다는 학원도 견뎌내지 못하면서 '가수를 꿈꾼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드라마과정을 시작했다. 기초반은 21주 과정이다. 늦가을의 노란 은행나무를 보며 시작한 수업은 내년 봄 벚꽃이 무르익을 때쯤 끝난다. 가수가 되고 싶은 아이처럼 여전히 '드라마 작가'가 꿈으로 남은 오십 중반의 나도 개론반 수업의 지난한 기간을 통과하다 보면 다음 플랜으로 승급을 하든 오랜 꿈으로 남기며 끝내든 그 결과가 분명히 적힌 하나의 공을 꺼낼 것이다.
우리들의 첫인상
우리 반은 서른 명이다. 20년 가까이 현직 작가라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무인도에 가게 되면 태블릿에 담아 갈 하나의 드라마'를 말해 보자고 했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다.
- 아니, 근데 무인도에서 태블릿은 어떻게 충전한다고 가져가지?
사실은 내가 가장 나이 많은 수강생일까 봐 조금 염려했었다. 나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글'이 아닌 다른 것으로 눈에 띄는 게 싫어서다. 그것은 기우였다. 정년퇴직을 한 분이 계셨고 몇 년 생인지 묻지는 않았지만 나와 동갑이거나 나이가 조금 더 든 것으로 보이는 분도 있었다. (그분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음, 저분이 나보단 더 먹었을 거야!) 그리고 나는 분명하게 듣지 못했지만 그가 출생연도를 말했을 때 모두가 놀랄 만큼 어린 사람도 있었다. 그에게 나는 엄마 뻘이다.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앞으로 2년 동안 교육원의 전 과정을 마치자는 각오로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 본방사수한 <미지의 서울>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미지의 서울>에서 발견한 박진영 배우가 좋아서 언젠가 내 드라마를 진짜로 찍게 된다면 주인공으로 박진영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다는, 기초반 학생치고는 성급하고 야심 찬 멘트도 덧붙였다.
스물아홉 명의 이름과 얼굴은 까먹었지만 다들 비슷한 고민과 의지가 느껴졌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등록했다는 말과 잠시 직장을 쉬면서 원하던 글쓰기를 시작한다는 말 그리고 현재 문학이나 방송에 관련한 일을 하면서 드라마 쓰기를 배우러 왔다는 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해외여행을 가면 내가 대한민국 국민의 대표인 것처럼 이곳에서 나는 50대 아줌마의 대표라는 마음가짐으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이런 각오라니, 역시 아침조회 때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합창하던 세대답다.
노트에 적은 것들
담임선생님은 그날의 학습목표와 배울 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착착 진도를 나가는 스타일이 아니셨다. 그러나 그의 몸짓에서는 이 생초짜들의 입에 하나라도 더 넣어주고 싶어 하는 어미새의 조바심이 너무 잘 보였다. 강의 중에는 선생님이 이쪽저쪽에서 날리는 화살들을 일단 되는 대로 받아 적고 나중에 찬찬히 주제별로 나눠 다시 써야겠다. 일단 수업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노트에 정리할 수 있으니 복습이 제대로 된다.
첫 주의 과제는 '일곱 개 작품 보고 오기'이다. 앞으로의 수업에 레퍼런스로 언급될 영화와 드라마들을 미리 보고 가야 한다. 하루에 하나씩 봐도 꽉 찬 일주일이 걸린다. 리스트에는 평소의 내 취향과 꽤 거리가 있어서 EBS 세계의 명화나 OCN 같은 데서 방영할 때마다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작품도 있었다.
부랴부랴 찾아보니 일곱 개 중 세 개는 넷플릭스에, 세 개는 쿠팡플레이에 있다.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 한 편은 스트리밍 하는 곳이 없어서 vod 구매도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dvd방이란 데는 혹시 있나 전화를 해 볼까 생각도 했다. 뒤지고 뒤져 해외 유튜브 채널에서 풀타임 영상을 찾았다. 우리말로 번역된 대본은 구할 수 없고 구글에서 영어 대본을 다운로드하고 같이 볼 한글 자막파일도 구했다. 이 정도면 순조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은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소양과 기본기 훈련을 여러 번 강조하셨다. 알고 보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의 기본이기도 해서, 시어머니의 비법 양념을 기대했다면 슬쩍 김이 샐 수도 있겠지만, 그 당연한 것들을 알면서도 못 하고, 해야 된다는 데도 안 하는 게 인간이 아닐까.
드라마 공부를 하려면 집에 프린터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빠르게 주문했다. 프린터 회사 공식 홈에서 구입했는데 마침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중이어서 다른 판매처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아, 오 년만 일찍 시작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자리에서 드라마 두 편을 내리 보고 일어났더니 허리가 묵직하고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강의실에서 필기한 내용을 옮겨 쓸 때는 눈이 뿌얘서 아예 안경을 벗는다. 그러다 든 생각이다.
대체 나는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건가.
설마 나는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솔직히 모르겠다. 재미 삼아 동네 언덕을 오르내리다가 갑자기 100대 명산 챌린지를 시작하라는 인증 타월을 받아 든 기분이다. 일단 받은 타월을 목에 걸고 운동화 끈을 꽉 매는 수밖에 없다. 챌린지를 하다 보면 근육이 붙고 뼈가 단단해지고 발바닥이 두꺼워질 수도 있다. 산에 오를수록 힘도 덜 들고 속도가 빨라질 수도 있다.
반대로 산에 올라보니 강해지기는커녕 무릎이 쑤시고 종아리가 땡땡해서 걷기 힘들 수도 있다. 애초에 왜 여기에 온 거냐며 후회할 수도 있다.
내일의 나를 알 수 없지만 일단 집을 나서서 걷기 시작한다.
산 중턱에서 포기하고 내려오더라도, 저 산에는 뭐가 있을까 하며 바라만 보던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그 산에 올라가 본 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는 미련 없이 운동화를 벗어 버리고 편안하게 커피를 마시며 먼 산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