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업이 있던 주
첫 수업에서 세 명의 얼굴을 익혔다. 그중 한 명이 강의실 앞에서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시작이 좋았다.
수강생들이 일찍 온다. 30분 전에 들어갔는데 벌써 서너 명이 앉아 있었다. 책상이 맨 앞자리부터 채워지는 것도 신기하다. 심지어 선생님도 수업 시작 25분 전에 오셨다.
선생님은 우리 개론반 서른 명의 현재 수준과 수업에 대한 기대치, 희망 도착점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중간 정도에 눈금을 놓고 수업을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수준은 어디쯤일까? 3막 구조, 캐릭터 아크, 안타고니스트... 이런 용어들 중에 들어본 것도 있고 처음 듣는 것도 있으니까 대충 중간 같기는 하다.
수업이 끝나기 전, 선생님은 오늘 수업의 포인트 세 가지를 다시 짚어주셨다.
많은 것을 알려 주려다가 다소 정신이 없던 첫 수업을 퇴고하신 걸까. 아니면 오늘따라 우리들의 표정이 못 미더웠던 걸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두 번째 수업에서는 '인물'에 대한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극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면 이야기도 갈등도 아닌 캐릭터다.
'두 개의 태양이 없다'는 말은 주인공이 단 한 명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시점'을 가진 중심인물이 한 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축이 하나여야 갈등의 전개와 해소가 깔끔하고 이야기의 동력이 흔들리지 않는다.
또, 주인공은 어떤 종류든지 결함이 있어야 한다. 아무런 결점 없이 완벽한 인물은 사랑받기 어렵다. 보는 사람이 끝까지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 역시 주인공에게 공감이 되어야 본방사수를 한다. 대중에게 호평을 받고 실적도 좋았던 작품들-<나의 해방일지>, <폭삭 속았수다> 등-에는 주인공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없이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많지만 막상 내가 공감하고 친밀감을 느끼는 '한 사람'을 찾지 못했고 둘 다 앞부분만 보다 말았다.
반면에 <미지의 서울>은 여자주인공 미지와 남자주인공 호수에게 처음부터 연민을 느꼈고 그들이 잘 되는 결말을 기대하며 마지막 회까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더 글로리>의 문동은과 <눈이 부시게>의 혜자도 내가 지지하는 주인공들이다.
내가 빚어낸 주인공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 쓰지 않으세요?
수업이 끝나고 처음으로 조별 모임 시간을 가졌다. 집으로 오는 길에 조원 한 명과 지하철역에서 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지난 수업의 자기소개 때 내가 한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던 '교육원의 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는 것'은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고 했다.
30분 전까지도 모르는 사이였던 그녀가, 정말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시간도 많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으시다면서 왜 당장 쓰지 않으세요?"
오랜만에 엄마한테 등짝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질문은 차갑지만 따뜻했고 보드라운데 거칠었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나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면서 흔한 작법서 한 권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따라 써보기는커녕 대본을 찾아서 읽은 적이 없다. 쓰고 싶은 소재들을 소중하게 저장해 놓았지만 어느 하나라도 잡아서 기승전결의 줄거리를 끝까지 엮어본 적도 없다.
그러게. 나는 왜 쓰지 않지?
가슴속까지 뜨끔한 화두를 던진 그녀는 4호선 상행선 쪽으로 떠났다. 그녀의 야구모자를 따라가다가 나는 하행선이 지나는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두 번째 수업에서는 공식적인 과제가 없다. 나는 자체적으로 과제 세 가지를 만들었다.
1. 기존 단막극 대본(약 A4 40매)을 골라서 출력한다-> 대본과 함께 실제 방영된 드라마를 본다. 대본과 드라마가 달라진 부분들도 확인한다->대본을 워드에서 그대로 따라 쓴다. 단막극의 대본 길이를 체감할 수 있다
2. 내가 생각해 둔 이야기 하나의 기획안을 완성한다. 주제, 작의, 등장인물을 구상하고 줄거리를 써 본다.
3. 작법과 개론 자습에 필요한 참고도서 두 권을 상호대차로 빌렸다. 이 책은 14일의 대여 기간 동안 완독한다.
이 과제들을 스스로 끝내고 스스로 검사하기가 이번 주 목표이다.
'지금 당장 뭐라도 쓰자!' 하고 결심하니 지금껏 저 멀리에서 드문드문 두더지 같이 머리만 내밀었다가 들어가던 얘깃거리들이 조금은 가까이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체력장 시험이 있었다. 여러 종목 중에 우리가 꽤 힘들어하던 것이 오래달리기였다.
한 번은 체육시간에 오래달리기를 연습하는데 우리 반 누군가가 옆구리가 아파서 못 뛰겠다며 중간에 포기했다. 그날 우리 모두에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단 완주를 해야 돼. 그래야 내가 언제쯤 숨이 차기 시작하는지, 어디쯤에서 다리가 무거워지는지 알 수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800미터라는 거리를 완전히 끝내봐야만 정해진 시간 내에 들어오는 방법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내 기억에, 체력장 본시험에서 오래달리기를 통과하지 못 한 친구는 없었다.
꼴찌로 들어오더라도 800미터를 끝까지 달려봐야 그 길이를 알 듯이, 허술하더라도 단막극 하나를 끝까지 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