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재킷을 입어야 할 일이 생겼다.
직장에 다닐 때는 오랫동안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는 싱글 정장이 원칙이었고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는 자율과 반자율의 중간 규정으로 바뀐 것은 퇴직 직전의 몇 년 정도였다.
옷 탐이 원래 없는 남편은 정장을 입고 출근할 때조차 비싼 와이셔츠나 슈트를 사지 않았고 계절별로 한두 벌 가성비 좋은 양복을 구입해서 잘 간수하며 오래 입었다.
큰딸이 아빠의 가을 옷을 잔뜩 사 줬던 쇼핑을 마지막으로 남편은 이제 준수해야 할 복장 규정이 없는 자연인이다.
멀쩡한 아우터와 산 지 얼마 안 되는 몇 가지 옷을 빼고 회사 다닐 때 입던 것들은 퇴직 후에 거의 다 처리했다.
아마도 우리 나름의 중간 마침표 같은 의식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오랜만에 꺼내 입은 검은색 블레이저도 10년은 넘은 옷 같다. 하나만 입고 나가기엔 추운 날씨여서 싱글 트렌치코트를 스타일러에 돌려서 덧입게 했다.
남편이 나가고 난 후 옷장을 살펴보았다.
옷을 정리하면서 춘추복과 하복 정장을 한 벌씩 남겼었다. 투 버튼에 뒤판에 가운데 절개 라인이 하나만 들어간 클래식한 스타일이니 급하게 양복 입을 일이 생길 때 요긴할까 싶어서다.
그런데 챙겨 뒀던 양복을 꺼내 보니 역시 안 되겠다.
드라이클리닝을 반복했던 터라 특유의 번들거림이 보였고 어떤 부분들은 생활감으로 얄팍해졌다.
남겨뒀던 양복을 모두 처분 박스에 넣었다.
정장을 입을 일이 일 년에 한두 번이나 있을까 말까에다 웬만한 곳이 아니라면 슈트를 빼 입고 가는 게 더 어색한 시대가 되었지만 성인 남자가 제대로 된 양복이 하나는 있어야겠고... 고민이 됐다.
며칠 후, 남편과 함께 아웃렛 매장에 가서 두리뭉실한 인상의 블레이저를 샀다. 총 세 가지 색상 옵션이 있었는데 초록색이 도는 중간 회색과 청색이 도는 중간 회색 그리고 짙은 회색이었다. 청색이 도는 중간 회색이 차분하면서도 경쾌해 보이고 같이 입을 이너나 하의의 여러 색상에 소화가 잘 되는 것 같아서 그걸로 골랐다. 한여름과 겨울 빼고는 입을 수 있는 두께와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이 옷 저 옷 입어 보는 남편은 30대 때에 비해서도 체형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뒤에 서 있는 거울 속의 나만 갱년기 뱃살이 붙은 것 같아서 다이어트의 결심이 불타올랐다.
나이가 들수록 옷을 잘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하지만 '비싼 옷'을 입으라는 뜻이 아니다.
중년기에 무너지는 몸의 단점을 보완하고 아직 남은 귀한 장점을 살려주는 디자인, 주름진 나의 안색을 더 밝게 해 주는 색상, 내가 지향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옷을 입으라는 뜻이다.
왼쪽 가슴에 빨간 여우 얼굴이나 왼쪽 팔뚝에 네 개의 흰 줄은 없어도 좋다.
청년 시절과 꼭 같이 설레는 심장과 세월만큼 무거운 장바구니를 여전히 척척 드는 전완근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