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의 순기능
그 방에는 덩치가 제법 큰 철제 수납장이 있었는데 당장 안 쓰지만 버리기 아까운 이것저것을 다 쑤셔 넣고 잊어버리기에 딱 제격인 문제아였다. 그 빌런을 빼 버리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굳은 의지로 서서 공부하겠다며 딸이 사 들인 키높이책상도 눈엣가시다. 지금은 원래의 기능으로 안 쓰는 것 같아 확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방주인에게 물어보고 처리하려고 일단 목숨만은 살려두었다.
나는 딸의 좁은 방안에 옷장을 놓는 대신 방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 스탠드 행거와 서랍장을 놓고 옷을 수납하게 한다.
환절기에 주부들의 가장 큰 일거리는 옷정리다. 롱패딩, 코트와 스웨터 등 겨울 옷을 세탁하고 수납해야 하고 봄여름 옷들은 꺼내서 선별하고 주름이나 묵은 흔적을 정리해야 한다.
딸의 옷박스에서 앞으로 입을 만한 것들을 꺼내 스타일러에서 손질한 후 걸어두었다.
만약 매일 쓰는 방이라면 봄을 맞아 책상도 바꿔주고 좀 더 적극적으로 뒤집고 싶었지만 거의 비어있는 방이니 공간을 환기하는 정도로 일을 마쳤다.
딸이 자주 쓰는 화장품들을 다 가져가고 거의 빈 서랍들을 뒤지다가 디올 립글로스를 발견했다.
얼마 전 모임에서 멋쟁이 언니가 꺼내 바르던 그 분홍 케이스라 나 같은 화장품알못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돌려보니 색깔도 무난하고 아직 반이상이나 남았다.
고것이 이걸 기숙사에 가져가지 않았다는 건,
1. 이것의 존재를 까먹었거나 모른다.
2. 설령 이것을 보았더라도 이제 별 필요 없다.
는 뜻일 것이다.
평상시에 나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선크림 혹은 비비크림을 바르고 립글로스를 바르면 끝) 일 년에 몇 번 안 쓰는 포인트메이크업 제품은 다 작은딸이 잘못 샀거나 싫증이 난 것들을 얻어서 쓰고 있다.
우리 모임의 멋쟁이 언니도 쓰는 디올 립글로스는 이제 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리정돈의 순기능이 아닐까 싶다.
문득, 현금만 쓰던 옛날에 엄마가 아빠 옷 주머니에서 지폐를 발견하고 엄청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다들 카드를 쓰는 요즘은 그런 재미가 없어서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