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이강백. 파수꾼.

스릴러를 즐기는 기묘한 방법

by 김병섭


지식이란 대답의 나열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의 연쇄이다.


먼저 정확하게 묻고, 정확하게 답하려 애쓴 후에야


우리는 비판하고 공감하며 상상할 자격을 얻는다.


먼저 정확하게 이해하려 애쓴 후에야


내가 당신을 사랑할 자격을 얻듯이.






1.


반전의 반전의 반전.


이강백 작가님의 희곡 '파수꾼'은 권력형 범죄의 구조를 파헤치는 스릴러다. '진실을 알리려는 개인'과 '거짓을 지키려는 권력'의 대결. 이런 장르의 이야기는 보통 한 두 개의 반전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되는데, 이 작품에는 무려 5번의 반전이 등장한다. 놀라운 것은 그 반전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치밀하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2개의 반전은 이 작품의 이야기 전반을 다시 돌아보게 하며 읽는 이에게 다음과 같은 서릿한 질문을 선사한다.


"거짓으로 완성된 구조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첫번째 반전- 양철북 '다' : 진실을 알아낸 인물


'파수꾼'의 첫번째 반전은 이리떼는 없다는 것이다. 마을 경계의 망루에서 이리떼를 발견하면 양철북을 치는 임무를 맡은 '다'. 그는 망루의 사람들이 모두 잠든 어느 날, 걱정스런 마음에 홀로 망루에 올랐다가 진실을 알게 된다. 이리떼는 없었다.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외침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오직 흰구름 뿐. 이리떼가 없다면 이리떼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구성된 이 시스템은 모두 잘못되었다. 이 진실을 밝히면 경계를 위해 들이는 이 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수고가 거두어질 것이며, 마을의 사람들은 더 자유롭게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짜 시작은 여기부터. 이리떼가 없다는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있었다. 그는 누구인가?




두번째 반전- 촌장 : 진실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이전에 이미 있었다. 그는 '촌장'이다. 마을의 권력자인 그는 '다'가 '식량운반꾼'에게 보낸 편지, 식량운반꾼이 그에게 배송한 편지, 그래서 식량운반꾼이 온 마을 사람들에게 '이리떼가 없다'는 소식을 알리게 한 그 편지를 들고 '다'를 찾아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촌장의 고백.


촌장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리떼는 없다. 그러나 진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질서'다. '이리떼가 있다'는 전제 아래 만들어진 마을의 질서. 이리떼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계와 공포', 마을 밖 공동의 적에 대한 그 경계와 공포가 완성한 마을 사람들의 '단결'.

이 단결 안에서 마을 사람들은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며 마을의 공동체를 유지한다. 촌장은 이 질서가 소중하며 그러므로 함께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질서가 주는 단결과 안정, 평화와 공동체는 쉽게 이룰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소중하고,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실을 이미 알게 된 '다'에게 그러한 주장은 닿지 않았다. 거짓은 거짓이다. 결연한 '다'를 보고 촌장은 결국, 다와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기로 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하루의 시간과 한 번의 거짓말. 이것이 세 번째 반전이다.




세번째 반전- 하루의 시간과 한 번의 거짓말 : 거짓을 지키는 조건


촌장은 '다'에게 애걸한다.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쳐 죽일 것이라고 하며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를 바란다. 자신의 처참한 죽음을 묘사하며 촌장은 '다'에게 진실을 함께 알리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하루만 기다려 줄 것. 둘째, 한 번만 거짓말을 해 줄 것.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보이며 동정에 호소하는 마을의 최고 권력자를 두고 '다'는 고민한다. 결국 '다'는 그의 조건을 따르고, 결국 '다'는 진실을 알리는 데 실패한다. '하루의 시간, 한 번의 거짓말'은 거짓을 지키기 위한 촌장의 계략이었다.


'하루'라는 조건으로 촌장은 '다'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그 하루 동안 촌장이 의도한 것은 '다'의 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시간이었다. '한 번'이라는 조건으로 촌장은 '다'에게 거짓말을 부탁한다. 단 하루만, 사람들의 분노가 조금만 식을 때까지만, 그리하여 촌장이 죽지 않을 수 있는 만큼만, 꼭 그만큼만 기다려 주기를, 그래서 이번 단 한번만, 이제까지 계속 해 왔으며 앞으로는 다시 하지 않을 그 거짓말 -'이리떼가 나타났다'라는 말을 꼭 한 번만 해 주기를, 촌장은 다에게 요청한다. 어차피 지금까지 늘 해오던 일, 하루만 더 한다고 무슨 일이 더 있겠는가. 들끓는 사람들의 분노와 머리를 조아리는 마을의 최고 권력자를 보다 '다'는 수용한다. '다'는 자유와 평화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도 어느 한 사람의 처참한 주검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실패했다.


'다'는 분노로 몰려든 마을사람들을 향해 거짓말을 한다. "이리떼가 나타났다." 다가 한 인간에 대한 애처로움으로 딱 한 번만 더 했던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다'는 거짓의 세계에 편입되었다. 이제 그의 진실은 힘을 잃었다. 거짓말보다, 거짓말을 했던 순간이 더 중요했다. 그는 가장 절실하게 진실을 요청받은 순간에 거짓을 고백했던 것이다. 그의 진실은 여전히 진실이지만 그의 진실은 이제 힘을 잃었다. 그가 다시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거짓이 거짓임을 증명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며 그것은 그의 진실의 힘을 더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외침이 '다'에 의해 외쳐지고,

들끓는 분노가 그보다 더한 공포로 반전되고,

그러니까 그들의 분노가 집요한 질문과 확인으로 이어지지 않고,

경계와 공포의 양철북 소리에 다시 놀랍도록 안정과 평화로 찾아오고,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후,

촌장은 죽음을 두려워하던 얼굴을 거두고

'다'에게 짧고 분명하게 내뱉는다.


"넌 이곳에서 일생을 지내야 한다."

"마을에는 오지 마라."


동정과 부탁의 조아림에서 순간에 명령으로 돌아서는 촌장 앞에서 '다'는 얼어 붙는다. 무대를 채우는 바람 소리. 어느 순간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가의 외침이 들리는데, '다'는 그를 따라 양철북을 친다.

그는 촌장이 유지하는 질서에 결국 순종한 것이다.


이강백 작가님의 파수꾼은 이 장면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이것만으로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 강렬한 마무리이지만, 이 작품의 반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촌장이 남기는 이상한 말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사로 인해 우리는 촌장이 어떻게 진실을 알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다'는 어린 시절의 촌장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네번째 반전- 추억 : 촌장이 늘 그리워하던 것


"넌 내 추억이야"


이 작품이 끝나갈 즈음, 촌장이 남기는 이상한 말.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그러니까 촌장에게 '다'는 추억이다. 그것도 아프고 괴로운 추억이 아니라 그리워하던 추억. 그랬다. 촌장도 '다'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그에게도 '다'만큼이나 순수한 열정과 순수한 분노로 떨쳐 일어났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시절은 그에게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 내내 그리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억일 뿐, 오늘의 현실은 아니다. 오늘, 이곳에서 촌장은 '진실을 알리는 자'가 아니라 '거짓을 지키는 자'로 살고 있다. 촌장이 오늘도 '진실을 알리는 자'로 살고 있었다면 그에게 '다'는 그리운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혹독한 오늘의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진실을 아는 자'에서 '거짓을 지키는 자'로 나아가게 한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딸기'다.


"내 마음은 너와 함께 딸기 따기에 가 있다.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그에게 진실을 알려 준 것은 '딸기'였다.

그는 야생딸기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 야생딸기를 따러갈 때면 그는 즐거웠다. 너무 즐거워서 경고문도, 덫도,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파수꾼의 외침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부터인가 그는 경고문과 덫을,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파수꾼의 외침을 따라 다녔다. 경고문과 덫이 있는 곳에서 더욱, 이리떼가 나타난다는 외침이 있을 때면 더욱 그는 많은 딸기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떼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딸기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 반복된 경험이 그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다. 이리떼는 없다.


'다'가 촌장의 추억이며, '다'에게 '촌장'이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는 것으로 짐작하건데, 처음에는 촌장 또한 '다'처럼 진실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 또한 거짓의 비효율과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고 진실이 가져다줄 진정한 자유화 평화를 바랬을 것이다. 거짓을 향한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분노. 진실을 향한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염원.


그러나 촌장은 결국 그 순수한 열정을 꺽는다. 어쩌면 그도 역시 그의 어린 시절 마을의 질서를 지켰을 권력자에게 설득 당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충분히 가능하며 그럴 수 있다. 오늘의 권력이 늘 오늘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별스런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확하게 보아야 할 것은, 이 작품에 그러한 상상의 여지는 등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선명하게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딸기다. 촌장이 사랑했던 딸기. 경고문과 덫이 있는 곳에서 더욱, 이리떼가 나타난다는 외침이 있을 때면 더욱, 그가 많이 얻을 수 있었던 딸기. 이리떼에 대한 그의 반복된 경험이 그에게 준 것은 진실만이 아니었다. 이리떼에 대한 그의 반복된 경험은 그에게 '이익'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권력이란 이익이 모이는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 촌장의 권력 또한 거짓으로 유지되는 질서, 그 질서가 확보해 주는 촌장의 이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직 반전은 끝나지 않았다. 이 희곡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이고 진실을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은 '촌장'이지만, 그들 외에도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뛰어난 스릴러에 등장하는 진짜 범인은 늘 곁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 희곡에도 등장하는 그 사람. 그는 누구일까?




다섯번째 반전- 늘 곁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사람


이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다시 돌아보자.


마을사람들: 진실을 전달 받았으나 결국 거짓에 속는 사람들. 거짓을 발견했을 때 끝까지 묻고, 끝까지 의심하며, 끝까지 증명하기를 포기한 사람들. 경계와 공포를 두려워하지만, 경계와 공포 속에서 안정과 평화에 중독된 사람들.


마을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평화와 안정에 편들며 항변할 수 있다. 거짓이면 어떤가? 우리는 이렇게 즐거운데. 그럴 수 있다. 세상에 우리가 모르는 진실이 어디 한둘인가? 우리가 섬기는 거짓이 한둘인가? 우리 모두가 평화와 안정 속에서 공동체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딴 진실과 거짓 쯤 무슨 문제인가?


나 역시 동의한다. 나 또한 순결한 진실의 수호자나 결벽한 거짓의 증오자는 아니다. 사람살이가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마음에도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정말 이 마을은 평화롭고 안전한가?"


마을의 평화, 그 뒤편에 무참한 폭력이 있었다. 마을의 평화 그 뒤편에서 어느 개인은 모함과 조작으로 폭력 속에 있었다. 이 마을이 만든 질서의 최종 목표는 행복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단결'이다. 이 단결을 해치는 것은 처벌하고 추방해야 할 적이다. 그러므로, 마을의 단결을 위해 복종하지 않는 개인, 마을의 단결을 의심하는 개인, 그리하여 마을의 평화와 안정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며 우리가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누리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 권력과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개인은, 오직 고귀한 단결을 깨고 혼란의 시간-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거쳐야 할 그 시간을 가져오는 개인은 이 마을의 적이다. 그들을 이 마을의 촌장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식량배달꾼'이다.


식량배달꾼은 파수꾼 '다'가 부탁한 편지를 읽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의 부탁대로 촌장에게 편지를 건넨 후, 자신도 알게된 그 진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 결과로 그가 받은 것은 그의 노고에 대한 칭찬과 감사와 격려가 아니라 처벌과 응징과 혐오였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 불행한 개인이 식량배달꾼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진실을 알리려는 또 다른 개인에게 거짓을 지키려는 촌장이 다른 행동을 할 리 없다. 촌장은 자신의 이익과 권력에 반하는 개인은 언제든 거짓말쟁이로, 첩자로, 적으로, 이리떼를 섬기는 불온한 마녀로 단죄할 것이다.


이 모든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있다. 파수꾼 '다'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한 사고였을 뿐이다. '다'는 '나'의 후임이었을 뿐이다. 양철북을 치며 평생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하고 살아온 파수꾼 '나'. 그는 촌장이 바라는 이상적인 인물일 테다. 아마도 그의 바람은 온 마을 사람들이 '나'처럼 살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이리떼가 존재한다는 것을 신념으로 이리떼에 대한 경계와 공포에 신속히 대응하고, 그 신속함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러나 온마을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촌장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이 있다. 늘 곁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한 사람. 경계와 공포의 시작과 끝을 선언하는 한 사람. 그리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대사 몇 마디밖에 없지만, 이 희곡의 설정 그 자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한 사람.


그는 망루에 오르는 유일한 사람, 바로 파수꾼 '가'이다. '이리떼가 나타났다'는 그의 외침을 따라 양철북은 울리고, 그 때야 마을의 경계와 공포는 시작된다. '이리떼가 물러갔다'는 그의 외침으로 사람들은 안도하고 그들의 평화와 안전을 축하한다. 그러해야 다시 맹렬하게 경계와 공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건의 시작과 결말은 그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다'는 단 한 번 망루에 올라간 일로 이리떼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 그의 옆에서 흰구름만이 떠 있는 들판을 보고 '가'는 이리떼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물론 '가'는 '정직한 멍청이'일 수 있다. 이리떼와 흰구름을 구별 못하는 그저 순진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 수 있다. 더구나 '가'가 촌장의 또 다른 공모자라는 주장에 다른 명확한 근거를 더 찾기는 어렵다. 다만 그러나 이것을 그저 순진한 사람의 능력부족으로 이해하기에는 강력하게 의심스런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이상하리만치 치밀한 그 정황.




그것은 다시 이야기를 거슬러, 촌장이 다를 찾아온 장면이다.

'다'가 촌장의 계략에 빠져 분노한 마을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했을 때다.


"다: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가'의 손이 번쩍 들려지며 그도 함께 외친다. 울려 퍼지는 북소리.


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리떼는 없었다. 그러나 가는 이리떼가 나타났다고 함께 외쳤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사그라들고 다시 이리떼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난 후, '가'가 외쳤다.


"북소리 중지! 이리떼는 물러갔다!"


'가'는 이리떼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리떼가 몰려온다고 외쳤다. 더욱 이상한 것은, 발견하지도 못한 이리떼가 물러갔다고 외쳤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이다. 그의 외침은 어떤 순간에 외쳐졌는가?


그것은 촌장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 촌장이 모든 권력과 이익,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었다. 망루를 독점하고 진실을 판단하는 권력을 쥔 '가'의 정체. 그저 무능하고 순진한 착시로 보기에는 너무도 절묘한 순간에 너무도 중요한 말들을 외치는 파수꾼 '가'.


이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건데, '가'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제 3의 인물, 촌장의 권력과 이익을 지켜주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인물로 의심할 수 있겠다.


물론 더 구체적인 증거나 대사나 지문 한 줄 근거로 내세울 만한 것은 없다. 더 이상의 추론은 불가능한 상황. 여기에서 이 상상은 멈춰야 할 테지만...




두려운 것은 오늘의 현실이다. 오늘 우리가 목격한 우리 사회의 망루들- 옳고 그름을 정확히 분별해 주리라 믿었던,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헌법에 대한 비판이라며 자신들의 공정함을 천명했던 이들의 저 치밀하고 추악하며 섬세한 농단을 보고난 후, '가'에 대한 나의 의심은 확신에 이르렀다. 사실과 거짓을 판별하는 우리 시스템 최후의 망루들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공공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운영될 것으로 믿었던, 오로지 사실과 거짓을 명확히 판별하는 데 노력할 것이라 믿었던 그 많은 망루들이 오늘날 얼마나 처절하도록 치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었는가?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군가는 의심해야 한다. 그렇게 쉽게 마을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누군가는 묻고, 따지고, 확인하며 처절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유지되는 이 마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면서도, 이 마을을 옥죄는 거짓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 사는 세상에 좀 더 넓은 평화, 좀 더 넓은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에 대한 의심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 물론, 그것이 스릴러를 즐기는 더 즐거운 방법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안비밀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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