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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꿀동 Jun 23. 2015

글쓰기의 어려움

이토록 무섭고도 황홀한 세계


타인이 인정할만한 글을 써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보다도 어려운 것은 내 마음에 차는 문장을 찾아내는 일이다. 예전에 어떤 잡지사로부터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적 있다. 기자라는 직업을 진지하게 고민해보다가,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지인분께 애로사항을 여쭈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족스럽게 써내려간 글의 첫머리는 몇십년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지만,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워지는 글도 부지기수라고. 그것들을 평생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니 이토록 무섭고 황홀한 세계가 어디 있겠느냐고.



그런식으로 내 글을 책임질 각오가 서있지 않았기에 그 자리를 거절하는 꼼수를 부렸다. 내깐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처럼 똥줄타게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단번에 매끄러운 글을 만들어낼 (것 같은) 더 적합한 사람이 있으리라 자기합리화를 했다. 이제와서 말이지만 비겁한 변명이었다. 송대의 대문장가 소동파도 적벽가를 완성하기까지 초고를 수십번이나 고쳤다. 천재조차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퍼붓는데, 나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도망친게 아닌가. 타인의 글쓰기와 비교를 집어치우고 나만의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지 얼마 안됐다.




이후로 가장 정성을 들이게 된 부분이 문투다. 글이란 직접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기에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이 매우 한정적이다. 그나마 '개성' 을 가장 많이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 문(말)투다. 원하는 이미지를 가장 가장 잘 담아낸 문체를 찾기위해, 국내외 작가들의 글을 참고하며 연습해본 적도 있다. 국내작의 경우 각자가 자신의 말맛을 자신있게 드러낸다. 특히나 묘사를 보면 넋이 나갈 정도다. 저런 뜬금없는 비유를 가져다 참신한 형태로 빚어낼 수 있다니.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겐 될 수 없어, 라고 자괴감에 빠진다.



헌데 사실 닮고 싶은 쪽은 '국외작' 이다. 원어로 읽지않는 이상 원작자의 문체가 아닌 번역자의 문체를 읽는 셈인데, 이쪽이 묘하게 내 스타일이다. 호흡이 길지 않으며,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말하고 싶은 바를 전달한다. 여즉 분명한 내 문투가 생긴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 쪽으로 가자는 판단은 선 참이다. 사람마다 말하는 방식은 다르므로, 꼭 누구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중요한건 자기만의 말하는 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며, 그 차별성은 '비유와 묘사' 에서 온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생각하고 느낀 바를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하는가.



상대방에게 내가 의도한 바를 분명하게 납득시키는 일.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정기적으로 블로그 글을 탈고하는데, 읽을 때마다 고칠 곳이 보이니 신기하다. 완벽하게 매만져 놨다고 생각해도, 다음날 읽어보면 여전히 병신같아서 그만 울고싶어진다. 그래도 가끔씩 참신한 표현을 발견하거나, 그 표현을 보존하면서 개작을 할 수 있을 때, 흐뭇하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이 문장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앞으로도 줄곧 고생해야 할게다. 그래도 계속해서 밀어붙이면 언젠가 '나다운' 글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때로는 두려워하고, 황홀해하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http://qil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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