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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파편 Jul 10. 2024

다양성에 대한 가짜 존중 - 1. 정답이라는 착각

사회적 통념, 수식어, 인식, 기존 생각과 믿음으로 인한 착각

다양한 사람, 다양한 성격, 다양한 경험, 다양한 장소, 다양한 일 등

나는 다양성을 매우 중요시한다.


우선, 다양성 속에서 맛보곤 하는 새로움은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이런 것도 있구나' 등 놀라움, 신기함, 흥분감, 재미 등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내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하고,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등 넓고 깊게 이해하도록 돕고, 식견을 넓히고 개인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렇기에 나는 다양성을 매우 중요시하고, 항상 최대한 존중하려고 했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가끔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았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 부분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바람직한 것 혹은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단순히 취향과 선호에 있어서는 대부분 진정으로 존중했으나,

가치관, 성격, 행동 양식, 태도 등의 일부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겉으로는 존중한 것처럼 하였으나, 아니 일부는 존중하였으나, 분명히 있는 그대로 보지 않은 부분들이 꽤 존재한 것 같다.


생각해보니 대부분 '나'와 관련된, 지극히 개인적인, 삶과 관련된 부분들이었다.

아마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다고 믿는 부분들을 정답이라 믿고 싶어서, 강화하고 싶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혹은 나의 생각과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싶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사람의 성격과 매력에 대해 생각해보며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어떤 성격이건 장단이 있고 정답이 없는 것이건만, 가끔은 겉으로 '다 장단이 있지~', '성격은 틀린 게 없고 제각기 다르니까'라고 공허하게 말하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100%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 존중했다기 보다는 그저 관찰하고 분석하기도 했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감정 기복이 심하다', '감정적이다'는 것은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으로만 보고 어느 정도는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냉정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감정 기복'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부정적으로 해석이 되어서 그렇지, 감정을 더 크고 풍부하게 잘 느끼는 것일 뿐이다.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은 더 크고 풍부하게 느끼는 만큼, 좋을 때는 극적으로 느끼고 표현하곤 한다.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주변 사람들을 웃게할 만큼 말이다.

단지, 안좋은 것들도 더 잘 느끼기에 갑작스레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거나 그 감정이 확 커지기도 할 뿐이다.


반대로, '멘탈이 좋다', '단단하다'라는 것은 바람직하게 여겼다. 고난과 역경을 잘 헤쳐나갈 수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상대적으로 감정을 더 작게 느끼는 사람이다. 훈련을 통해서건, 원래 그렇건 더 작게 느끼기에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더 작게 느끼는 만큼, 감정을 잘 통제하고 침착하고 잘 대응하지만 주변을 환하게 비춘다거나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고양시키는데는 서투른 사람들이 많다. (물론, 감정적인 것 대신 단단한 신념 등과 같은 것으로 울림을 준다거나 동기부여 등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두 성격 모두 당연히 장단점이 있지만, 감정을 더 크고 풍부하게 느끼는 것은 '감정 기복'이라는 부정적 딱지가, 감정을 더 작게 느끼는 것은 '단단하다' 등의 긍정적 찬사가 붙곤 한다. 그것도 매우 많이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여러 영상, 강의, 서적, 콘텐츠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멘탈이 좋고, 단단한 것은 사업이나 커리어적으로 혹은 고난과 역경에 '유리한' 것일 뿐이다. 그것이 항상 정답은 아니다. 인생은 고난과 역경만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인생에서 사업이나 커리어적인 부분만이 최우선인 것도 아니기에 말이다. 인생에는 수 많은 즐거움과 기쁨이 있고, 증폭시키고 함께 나눌수록 세상은 더 밝고 풍요로워진다. 나는 감정을 적게 느끼는 사람으로, 절대 스스로를 증오하지는 않지만 나같은 사람만 있다고 상상하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어둡고 칙칙할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멘탈이 좋고 단단하면서도 잘 느끼기도 하고, 감정을 풍부하게 느끼면서도 고난과 역경을 잘 헤쳐나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희소하다)


아무튼, 분명히 나는 일광욕을 하듯, 감정적인 사람들의 기쁨, 행복감, 웃음, 따스함 등에 대한 풍부한 표현을, 밝은 에너지를 쬐며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감정기복은 개선해야하고, 단단해져야 한다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업, 발전, 성공, 성장, 능력 등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왔다보니 그러한 분야에 유리한 특질들만 계속 보게되며 정답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러한 서적, 영상 등의 콘텐츠들만을 찾아보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러한 점이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주입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정답이라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생긴 것 같다.



30년을 넘게 살고 이제서야 깨달았다니 아차 싶기도 하고,
이제서라도 깨닫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서라도 깨달아서 정말 다행이다.

누군가를 볼 때 훨씬 더 있는 그대로를 보며,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를 볼 때 마다 항상 평가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가끔씩은 있는 그대로를 보며 존중해주지 않았던 순간들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스스로 정답이라고,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이 존재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비단, 감정적인 부분 뿐이겠는가 부정적인 꼬리표, 긍정적 찬사를 떼고 본질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양면성을 띄고, 상황에 따라 장단점이 존재한다. 대다수가 그럻게 생각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여길 수 있을 지언정 그것이 정답인 것은 아니다. 단지 어디까지나 특정 부분에서 장점이 있고 좀 더 유리한 것일 뿐.


가끔은 잘 드러나지 않고 이면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지만

세상에 정답은 없고, 모든 것은 양면성을 띈다.

이미 여기저기서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특정 부분들에 대해서만 한정하여 생각하기도 쉬운 것 같다.

나의 경우처럼, 서적에서, 영상에서, 콘텐츠에서, 대다수가, 사회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것을 정답이라고, 바람직하다고 여겨버릴 수 있기에 말이다.

자신도 모른 채 말이다.




나에게는 사업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높은, 고난과 역경과 관련된 특질들을 정답이라고 여긴 부분들이 있었다는 점. 다양성을 중요시하고 존중한다면서, 이미 정답이라고 품은 부분들이 존재하여 항상 진정으로 존중하지는 않았던 점.

이번 계기로 이 두 가지를 깨달았다.

감사하고 소중한 깨달음으로, 앞으로의 삶에 영향을 많이 끼칠 깨달음 중 하나인 것 같다.


세상에 정답은 없고, 모든 것은 양면성을 띈다.

단지 수식어로 인해, 인식에 의해, 기존 생각과 믿음에 의해 그렇다고 착각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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