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로서 하라 켄야(Hara Kenya)의 이미지는 하얀색 캔버스에 고고하게 서 있는 단 하나의 검은 점이다. 켄야라는 점이 만드는 여백은 명상적인 힘을 선사한다. 이 여백은 주변의 요소를 긴장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지만 이를 직접 드러내지 않고 수용자가 그 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는 브라운의 디터 람스(Dieter Rams)와 또 다른 맛을 지닌 화이트 모더니즘이다. 디터 람스는 고도의 합리성을 이론적 무기로 하여 정교한 모더니즘을 선보인다. 그가 만든 제품 앞에서 우리는 생활의 지리함을 간단히 넘어서는 초월적인 마음과 동시에 20세기 산업 시대에 대한 뜻 모를 경의를 표하게 된다. 반면에 켄야가 그리는 흰 여백은 우리의 복잡한 마음에 차분한 정화를 선사한다. 이때 정화란 단지 불순물을 쓸어버린다는 의미로 파괴적인 평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즉 기존의 것을 모조리 무시하고 일체의 생각을 그만두게 만드는 가짜 평화가 아니다. 그의 디자인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시도하는 걸 주저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숨 막히는 텅빔(Empty) 속에서 우리는 천천히 침묵하며 명상에 잠긴다. 람스가 제품의 일상성을 넘어 경의의 자세로 사물을 대하게 만든다면, 켄야의 그래픽을 통해 우리는 조용히 한 점을 응시한 채 그것이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를 따라 정중동(靜中動)의 산책을 하게 된다.
이러한 둘의 차이가 카테고리 즉 제품 디자인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제품 디자인은 쓸모 있는 하나의 사물에 미학적 이음새를 부여하여 소비자가 일정의 돈을 지불하게 만든다. 람스는 소비자의 미적 기호성을 넘어 제품 그 존재 자체의 매끄러운 완벽성을 구현한다. 이로써 우리는 단지 제품을 소유하는 감각이 아니라 합리적 질서를 자신의 일상 안으로 가져왔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일상의 한 부분으로서 함께 존재하는 물성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켄야의 디자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즉시 긴장과 떨림을 유발한다. 작은 떨림이 지속하면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이야기 그리고 그 분위기에 우리는 계속 사로잡힌다. 정리하자면 이미 완결된 목적과 효과를 지닌 제품 디자인의 특성과 새로운 충격과 이야기를 전파하는 데 목적을 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라는 범주적 차이가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켄야라는 디자이너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라 켄야의 <미래의 디자인>은 그의 전문 분야인 커뮤니케이션 영역을 넘어 대문자로서 디자인(DESIGN)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대문자 디자인의 최대 사용처로 일본의 국가적 정체성을 집중 조명한다. 그가 주목하는 일본의 정체성은 세계 어디에도 비교 불허한 미의식에 근간을 둔다. 그에게 일본 미의식은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생활의 사상이다. 이를 보증하기 위해 켄야는 일본의 역사로부터 참조 점을 가져오기도 하며 동시에 현 일본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노동과 평범한 일상에서도 일본 미의식을 확인받고자 한다. 그리고 일본의 내부로서 고유한 미의식을 정식화하고 미의식의 외부화로서 대문자 디자인(DESIGN)을 다시금 언급한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에 기반한 것인지 혹은 일본 공중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관념인지는 중요치 않다. 다만 일본이라는 라벨을 버리고 디자이너로서 하라 켄야가 삼고 있는 지평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이외에도 <미래의 디자인>은 디자이너로서 켄야의 미래 비전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다. 그중에는 일본산업의 미래 과제로 디자인의 역할론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비전의 제안이라는 측면에서 과장된 바가 없지 않으나, 그가 역설하는 디자인 역할론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면서 동시에 디자이너인 나를 무척이나 설레게 한다. 설령 자국민의 미의식을 고양하고 그 핵심 역할로 대문자 디자인을 설파하려는 계몽주의적 의도가 다분하더라도 말이다.
여하간 그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분명하게 읽고 있으며 이로부터 내리는 세계 경제 대국 일본의 과제는 매우 정확해 보인다. 그가 표현하는 ‘공업 입국’을 넘어 ‘디자인 입국’을 통한 일본 경제의 새로운 도약은 그들의 발자취를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시의적절한 선언이라 생각된다. 국가와 사회라는 큰 테마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디자인의 미래를 그리는 하라 켄야에서 나는 직업인이 아닌 한 명의 사상가를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직업인의 한계 내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나에게 그의 디자인 계몽은 일종의 매니페스토로 느껴지기도 한다. 단 일본을 유난히 강조하는 국가주의적 슬로건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 책에서 켄야는 글로벌을 횡단하고 시간의 흔적을 추적하며 가장 일본적인 미의식을 다음의 키워드로 집약한다. ‘섬세, 정중, 치밀, 간격’. 이 단어들이 일본 문화에서 함축하는 의미나 뉘앙스를 직관적으로 알지 못하며 더욱이 켄야를 이해하기도 벅찬 나의 이해력 때문에 개별 단어의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물론 켄야 자신도 개개의 단어를 꼼꼼히 정의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입장이 아니라 부단히 걷고 관찰하면서 직접 발견한 일본 미의식의 풍경을 설명하고자 애쓰는 연구자의 입장으로 그 단어들의 뉘앙스를 전한다. 그렇기에 독자인 나는 개별 단어의 정확한 이해를 그려내기보다는 그가 안내하는 미의식의 풍경을 그저 따라가며 음미할 따름이다.
켄야가 발견한 미의식의 풍경은 일본식 모더니즘 건축이나 정제된 차 문화와 같은 고급문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직접 방문한 전람회에서 한 노동자의 행동에서 미의식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는 일본 노동자 특유의 책임감과 정직함으로 섬세하게 자신이 맡은 바를 수행하려는 태도가 자국의 미의식을 온연히 나타낸다고 본다. 문화적 향유와 생활의 자세를 모두 미의식에 결부시키면서 켄야는 미의식이란 일종의 사상과 같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사상을 다루는 직업은 비단 지식인에 한정되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실천에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개별화된 개인으로서 우리는 서로 다르게 살아가지만 결국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미학적 정신을 실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잠시 헤르더(Herder)의 문화민족주의가 연상되지만,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은 오직 디자이너로서의 사상 그리고 디자인의 미의식에 집중되기에 이 부분은 무거운 마음을 유지한 채 넘어가기로 한다.
“디자인은 스타일링이 아니다. 물론 물건의 형태를 계획적이고 의식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디자인이지마, 디자인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디자인이란 만들어내기만 하는 사상이 아니라 물건을 매개하여 살림이나 환경의 본질을 생각하는 생활의 사상이기도하다”
켄야는 [디자인-미의식-(생활의) 사상]을 일본의 정체성으로 연결 지으면서 가장 일본적인 디자인을 서구 미의식과의 비교를 통해 정립하고자 한다. 그는 현재 서구 미의식을 지배하는 사상을 ‘모더니즘’이라 일갈하고 이것의 배경을 근대 계몽주의 이후 형성된 합리적 개인의 주체성에서 찾는다. 그의 미학적 서사에 따르면 현대 서구의 모더니즘은 절대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근대 이전의 화려하고 과시적인 미의식을 종료하고, 합리성과 실용의 가치를 추구하는 근대적 주체의 미의식으로 탄생한 것이다. ‘Less is More(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는 슬로건은 서구 개인의 미의식을 그대로 표현하는 문장이다. 이는 미적인 것의 기준을 합리적 이성에 두고 이에 따라 불필요하거나 장식적인 것을 배제한 가운데 최대한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며 켄야는 이를 ‘심플(Simple)’이란 개념으로 갈음한다. 서구 미의식의 장대한 서사를 짚은 후 그는 ‘심플’과는 다른, 일본만의 간결미 혹은 모더니즘을 일본 문화와 역사의 자장 속에서 끌어낸다.
“일본 문화의 미의식 한복판에 있는 ‘간소함’은 심플과 동일한 경로를 거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심플은 150년쯤 전에 탄생했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그보다 수백 년 전에 ‘심플’이라고 부르고 싶은 간결하기 그지없는 조형을 발견할 수 있다. (중략) 감히 말한다면 ‘엠프티’, 즉 텅 빔이다. 그 간결함은 형태의 합리성을 탐구한 성과도 아니고 우연의 산물도 아니다”
엠프티 디자인과 심플 디자인이 별개의 맥락을 가진다는 그의 주장은 일본과 서구와 다른 제 3국의 지리적 위치에 놓인 내가 보아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이 글 위에서 디터 람스와 하라 켄야를 비교한 논점을 다시 가져와 심플과 엠프티의 차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흰색이라는 색면 활용에 있어 람스와 켄야의 맥락이 다르다. 일견 람스의 흰색과 켄야의 흰색은 동일한 미적 풍미를 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다른 효과를 내포한다. 람스는 제품의 일상성에 고도의 합리성을 부여하여 그 실용성이 극도로 진화된 아름다움의 일부로 흰색을 활용한다. 반면에 켄야의 흰색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지는 색면 즉 배경의 역할을 넘어 그것이 전달하는 주제와 이야기로 안내하는 조용한 명상과 같다. 즉 합리적 전체 중 일부로서 기능하는 흰색이 아닌 그 색면 안에서 함께 사유하고 조응하는 흰색으로 켄야의 디자인 그리고 그가 정의하는 일본 미의식의 ‘텅빔(Empty)’을 이야기할 수 있다.
미의식과 디자인 그리고 서구와 일본의 비교를 더욱 첨예하게 들어가면 이 글이 논하려는 켄야 디자인의 핵심을 넘어버린다. 다만 위와 같은 켄야의 담론을 정리해보는 일은 디자이너라는 사상가는 어떤 식으로 큰 주제를 다루는지 고민하기 적절한 것이다. 서구 근대와 현대의 미적 가치를 설명하는 키워드로서 그는 디자인의 언어로 풀이하여 해석한다. 설령 큰 틀에서 볼 때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이 기존 미학사의 궤적을 밟는다고 해도 이를 설명하는 중심 개념은 ‘심플’이라든지 ‘엠프티’라고 하는 다분히 디자인적인 단어다. 흔히 디자이너라는 전문 직업인 혹은 기능인이 전달하는 말과 글은 ‘지금 여기’라는 시간대와 소비자의 ‘니즈(Needs)’라는 프레임에 제한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켄야가 벌이는 담론은 디자이너의 시각을 과거와 미래로 확장하고 이를 해석하기 위한 디자인적인 에피스테메(épistémè)를 구축한다. 비록 그의 담론이 목표하는 지점은 여전히 국가주의적 슬로건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디자인 서사를 눈여겨 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점에 있다.
큰 테마를 다루는 지점 이외에 켄야의 디자인 에피스테메는 사물 그 자체에 대한 통찰에서도 드러난다. 섬유와 종이의 물성에 대한 독특한 정의 그리고 꽃꽂이 행위를 공간 디자인적으로 풀이한 대목에서 켄야라는 거장의 디자인 인식론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일부 소개하면,
“꽃꽂이를 장식한다는 것은 공간에 기를 통하게 하는 것이다. 공간이란 벽으로 에워싸인 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닿고 배려의 불빛이 켜지는 장소를 말한다.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위에 돌 하나가 동그마니 놓이면 거기에 특별한 긴장이 생긴다. 그 긴장을 매개로 사람은 문득 ‘공간'을 의식한다. 이렇게 시설 안에 작은 촛불을 밝히듯 띄엄띄엄 의식이 점등되면서 공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꽃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런 행위다. 조형 자체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움직임이 공간에 생기를 낳는 것이다(139쪽)”
“종이도 마찬가지다. 종이는 오늘날 ‘인쇄 미디어’라 불리지만, 옛 미디어의 전근대성을 전부 종이에 짐 지우는 말 같아서 거부감이 든다. 물론 종이는 문자와 관련하여 인간의 창조성을 촉발했지만, 그 매력은 단순히 인쇄를 할 수 있는 얇은 면으로 집약되는 것이 아니다. 종이의 촉발력은 우선은 그 백색에 있으며, 나아가 그 탄성에 있다. 자연물 중에 하얀 것은 그리 많지 않은데, 종이는 뛰어나게 하얗다(171쪽)
특히 종이에 대한 그의 설명은 어느 학문에서도 말하기 힘든, 오직 디자인의 관점에서 가능한 해석이다. 즉 그는 종이의 본질을 종이라는 물성이 함축하는 디자인적 측면에서 해석하고 그로 인해 인간 존재는 어떤 가능성을 실현해 나갔는지 정확하게 묘사한다.
켄야의 웅숭깊은 디자인 이야기는 디자이너의 말하기와 글쓰기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일종의 디자인 리터러시(Design Literacy)와 저자성(Authorship)에 대한 반성이다. 흔히 디자이너의 저자성은 단어와 글이 아닌 ‘비언어적 메시지’를 수행함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해진다. 즉 디자이너라는 전문인은 본래 비언어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에 단어와 개념으로 구성된 전통적 의미의 리터러시와 다르다는 입장이다. 설령 디자인 리터러시가 필요한 경우라도 그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물리적인 실체를, 지성적인 개념이 아닌 감성적인 느낌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켄야는 디자이너로서 비언어적인 메시지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디자인 저자로서 적극적으로 언어적 메시지도 함께 추구하고자 한다. 즉 그는 물리적이든 지성적이든 모두 디자인 담론의 주제로 삼고 ‘심플, 엠프티’와 같은 자신만의 디자인 용법으로 사물과 세계를 해명하는 것이다.
물론 켄야 본인이 교양이 깊게 농익은 노령의 전문가로서 디자인의 범주를 손쉽게 초월하여 다분야를 아우르는 글쓰기가 가능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디자인 리터러시가 다분야를 포괄하더라도 모두 디자인의 관점으로 풀이되고 집약된다. 또한 켄야의 담론이 학술적인 엄밀함을 갖고 있지 않지만 이를 불평할 필요는 없다. 디자인이란 진리를 향해가는 고고한 걸음이 아니라 남다른 관찰과 새로운 창조를 통한 더 나은 삶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미래 비전을 위한 디자인이든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디자인 에피스테메이든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저자성을 강조하는 글쓰기이든 그가 주장하는 디자인의 본령은 간단하다. 이는 일본식 영어 표현으로 조합된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다.
“잘 고안된 디자인을 접함으로써 각성이 일어나고 욕망에 변화가 생기며, 그 결과 소비 형태나 자원의 이용 방식, 나아가서는 일상생활의 양상이 변해간다. (중략) 니즈는 언제나 ‘루스’해지기 쉽다. 욕망은 루스한 니즈로 키워져서는 안 된다. 거기에 절제를 주고 매듭을 지어주는 것이 문화이고 미의식이다. 디자인은 그 대목에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에게 디자인이란 그저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을 넘어 문화와 생활에 대해 좀더 고민하고 성찰하며 그 세련됨을 만들어가는 욕망의 교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으로 고양되는 욕망의 에듀케이션 그리고 이 욕망이 만들어가는 미래에 관해 켄야는 언제나 긍정적이다.
오로지 켄야의 디자인 철학에 국한하여 그 의미를 조명하고 있지만, 나로선 여전히 삐딱한 마음을 떨구기 어렵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국가주의적 슬로건으로 디자인을 활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저버리기 어려운 점. 두 번째는 이것과 연관하여 ‘욕망의 에듀케이션’이라는 조어가 지닌 부정적 함의. 켄야는 디자인의 목적을 세련된 욕망을 함양하기 위한 교양으로 바라보며, 궁극적으로 국가의 산업과 문화라는 ‘전체’를 위한 긍정적 동인으로서 디자인의 역할론을 규정한다. 이렇듯 디자인을 전체의 목적 안에 묶어버리는 일은 오히려 디자인의 상상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라 켄야는 일본 디자인의 국가대표 역할을 자처하고 있고 단순한 구호가 아닌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기존 디자인의 풍경에 새로운 울림을 줄 수 있는 디자이너이다. 그의 전체주의적 이상론이 마냥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하는 점은 그가 펼칠 프로젝트의 상상력과 실제적 영향력이 여전히 우리의 목마름을 채워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의 디자인적 상상력이 국가와 산업 욕망의 멋들어진 슬로건으로 드러날 지 아니면 우리 생활의 저층부를 뒤흔드는 새로운 미학으로 디자이너의 저자성을 확대할 지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경우든 우리가 켄야의 디자인을 계속해서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됨은 분명하다.
본래 이 글의 제목을 ‘욕망’이란 단어로 점을 찍으려 했으나 켄야의 생각을 곰곰이 씹어보니 일본 디자인에 대한 그의 바람이 국가주의적 욕망보다는 디자이너로서 순수한 열정에 가깝다고 생각이 들어 ‘꿈’이라는 단어로 고쳐 썼다. 그가 나열한 국가주의적 단어만을 보면 글로벌로 유명한 디자인 센터장이자 일본 디자인의 상징으로서 무겁고 비장한 과제를 이야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목표의 핵을 이루는 내용에서 켄야는 한없이 순수한 디자이너로서의 열의를 드러낸다. 좁은 시각을 고쳐 쓸 생각도 않고 고래 힘줄 같은 욕망을 추구하는 현 세계에 대응하여 켄야는 자신만의 사유로 길러낸 디자인의 세련된 욕망으로 꼼꼼히 변혁해 가고자 한다. 물론 가장 일본적인 것을 디자인하기 위한 명시적인 목표가 있기에 완전히 순수한 것이라 바라볼 순 없지만 그가 전개하는 디자인의 사유와 창조적 그리기는 충분히 숙고할 만 것이다. 순수라는 단어가 그래도 걸린다면 켄야 디자인의 색면을 충실히 차지하는 흰색으로 달리 표현하면 어떠할까. 그리고 그가 구상하는 디자인의 긍정적 미래에 약간의 기대감으로 바라본다면 ‘하얀 꿈’이라는 표현으로 갈무리 지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