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舞踊)의 이미지 그리고 이미지의 무용(舞踊)
*변박(變拍) : 음악에서 자주 변화ㆍ교체되는 박자.
어쩌면 스스로 의식하지 않았고 일상적으로 큰 문제가 없으니 그동안 외면해 왔던, 꿈과 잠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 기존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 너머로 돌파하지 않는, 즉 관성적 힘에 더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일수도 있다. 소박한 실재론 속에서 파묻어 잠들지 않고 낭만적 꿈을 이미지와 텍스트로 부단히 쌓으려는 시도인 걸까. 백과사전이 다루는 알레고리에서 벗어나 현실과 현재가 만들어내는 고정된 문법에서 탈피해, 색다른 움직임을 포착하고 이를 이미지와 글쓰기라는 형식에 깃대어 보기에 그럴듯한 전리품 하나를 갖고자 하는 것일까. 불확실성에 대한 무모한 탐사는 결국 확실하고 조화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내면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변증법적 시각으로 해석할까. 달리 말해서 여기서 다루는 모든 알레고리적 이미지와 음악 그리고 글쓰기는 해체 충동(바타이유)이 아닌 오히려 자신의 양식을 초현실 속에서 구축하려는 형성 충동(브르통)에 가깝다고 봐야하는 걸까.
그렇다면 어떠한 꿈을 꾸고 있는가? 그 꿈을 꾸며 잠자는 이의 모습은 어떠한가? 잠에서 깨어나면 또 어떠한 꿈으로 향하려 하는가? 이 질문의 연쇄 속에서 결국 남게 되는 유일하고 의미있는 것은 이미지와 글과 같은 양식이라 생각되므로, 하루라도 그 분투의 기억들이 불투명해지기 전에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는 WorkinPeople의 정규 프로젝트인 THINK IMAGE PROJECT의 사이드 프로젝트다. 첫 번째 프로젝트(들뢰즈의 배움론)의 마무리 이후 두 번째 주제와 작업물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치게 늘어져 버린 탓에 중간에 호흡을 가다듬고자 곁다리로 진행한 것이 본 프로젝트다. 사실 이름을 밝히기 힘든 클라이언트의 의뢰에 따라 작업된 결과물을 다시 정리한 것이지만 근본적인 작업의 결이 THINK IMAGE PROJECT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를 사이드 개념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이고자 한 것이다.
작업의 골자는 ‘변박(變拍)에 대한 그래픽 실험’이며 그 주제는 변박의 진동이 삶에 대한 우리의 감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각 이미지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시각적 모티프는 유기체의 다양한 리듬을 모방하는 무용수의 변박적 움직임에 있다. 그러나 단순히 변칙적인 몸짓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박과 정박 사이를 오고가는 움직임이 이미지라는 박제화된 장소 안에 어떻게 거주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어떠한 생기와 이야기를 발현할 수 있는지 포착하고자 했다. 이야기의 키워드는 ‘압축성, 프리즘, 조화’로 압축된다. 이러한 키워드가 서사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며 종국에는 어떠한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그것이 성공적인지 아닌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할 것이다. 아래 이미지들은 변박으로 출렁이는 가운데 수면 위로 드러나는 진실한 몸짓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단말마로 끝나지 않고 삶의 의미로 뻗어나가고자 어떤 항구적인 조화가 있음을 일정한 레이아웃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어쩌면 몸짓의 변박적 진실들을 삶 안에 항구적인 조화로 정박시키려는 우리 자신을 압축적으로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허나 진실의 모든 측면을 다룬 것이 아니며 오직 변박과의 대결에 따른 순간의 진위를 전달하고 있기에 이 작업의 이미지들은 언제나 반영적인 것 한에서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무용은 태생적으로 변혁적인 힘을 내재한다. 그에게 무용은 이성의 단단함과 고매함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본연의 몸으로 존재할 수 있는, 보다 자유로운 삶에 대한 이념형이 된다. 니체의 무용론에 영향을 받아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은 무용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특정한 주제나 의미를 나르는 매개 혹은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자유의 충동으로서 무용. 그는 무대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서사적 움직임과 일상에서의 평범함 움직임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움직임은 무용이다’는 슬로건으로 우연, 돌발, 충돌, 놀이 등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용의 일상화가 아니다. 그가 이야기한 변칙적 개념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움직임으로서 무용과 일상적이고 변박적인 움직임으로서 무용을 대비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 그렇다면 무용의 이미지는 그것이 기승전결의 서사를 전달하든 우연적인 놀이를 유발하든, 진실된 움직임을 표현하려는 인간 자신의 분투 혹은 자기 변혁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러한 무용의 이미지를 포착하여 다시금 잘 정리된 이미지로 재형성하려는 움직임, 즉 이미지의 무용은 또 다른 수준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미지의 무용은 시각적인 언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움직임들의 콜라주를 지향한다. 이미지의 근본 형식이 모든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이를 정박시키는데 있으며, 이러한 콜라주 속에서 이미지의 무용은 무용의 이미지와는 다른 움직임으로 자기 변혁의 이야기를 풀이한다. 본 글쓰기에서는 각 이미지의 무용을 좀 더 극적으로 풀이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에 이미지를 통한 사유를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각 이미지의 서사에 어울리는 음악을 병치시킬 것이다. 마치 무용수의 움직임을 극화시키기 위해 배경음악이 필요하듯 이미지의 움직임과 이에 관한 글쓰기를 보다 선명하게 하기 위해 음악을 활용하는 것이다.
내용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왜 추상이라는 명백한 단어 대신 압축이라는 말로 풀이했는지 설명하는 것이 우선일 게다. 단순히 기존의 영어 사전과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현학적인 언어 놀음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추상’이라는 한국어가 지닌 다소 진부하고 퇴색된 의미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다른 단어로 대치하였다 말하면 그래도 솔직한 것이 되는 걸까. 아니면 ‘(무언가)를 추상한다’는 형식에서 그 지시적 범위(외연)이 지나치게 넓기 때문에 그보다 정확한 지시어를 사용하기 위함일까. 이러한 언어적 접근이 아닌 이미지의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추상화된’ 이미지는 언제나 주관의 해석과 시대적 맥락에 의존하는 불완전한 매체이기에 해당 단어를 거부하는 것일까. 이유가 어찌되었든 ‘추상'이라는 단어가 지닌 무용성, 횡포, 즉 지나치게 그 범주를 넓게 가져가서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를 내포하지 못하는 추상성에 대한 변박(辯駁)으로 ‘압축성’을 가져왔다고 이해해주면 좋을 듯하다.
1막은 클라이막스를 암시하기 위한 전주곡의 역할 이상을 목표로 한다. 작은 단서들을 천천히 드러내는 스타일이 아니라, 뒤이어 나올 전체 이미지의 서사와 사유를 압축적으로 담고자 했다. 그 자체로 완결된 이야기를 가질 수 있되 지나치게 설명적인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였다. 즉 전체 이야기를 추상했다기 보다는 이야기가 지닌 강도와 카타르시스를 압축적인 구도로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1장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는 여타의 작업 이미지와 비교했을 때 가장 직접적이고 사전적인 것들로 표현된다. 사각형의 단 하나하나는 무대를 상징한다. 다만 사각형의 무대는 정방의 각도가 아닌 비스듬한 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변칙적 리듬을 나타낸다. 변칙적인 리듬은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과정으로 하나의 거대한 개방형 무대를 드리운다. 사각형 각각의 변칙적 리듬은 개별로 보면 일치하지 않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것들이 서서히 올라가면서 안정적이고 단단한 무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완고한 축대는 이내 새로운 문법적 선의 관통을 허용하고 만다. 그 선은 정확한 수치의 벡터로 떨어지지 않는, 모든 면면이 불규칙한 굴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렁거리는 굴곡은 축대를 허물고 다시 원점으로 가로지른다. 이 두 이미지는 축조와 해체라는 과정을 전달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어떠한 암시적 의미의 예고도 남기지 않은채 완전한 형태의 파국을 선고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파국 자체를 유일한 결말로 상정함으로써 이미지를 완성하겠다는 종말론적 서사 형식을 취하고자 하는 걸까.
이 두 이미지는 결국 죽음 자체를 드리운다. 다른 여지를 남기지 않고 완고한 죽음으로 끝나는 파멸의 개념을 이미지의 순수한 동기로서 취하고 있다. 죽음 그 자체를 목적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의지를 달성하고자 하는, 이러한 순수한 의식을 우리는 ‘순교적(martyristic)’이라 부른다. 마치 사형 교수대처럼 보이는 저 이미지의 축대는 그곳으로 향하는 이의 강렬한 의지를 반영한다. 알베르 지로의 연작시를 토대로 아르놀토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가 작곡한 <달에 홀린 피에로>는 죽음의 움직임이 지닌 가장 완전한 형태의 리듬을 우리 앞에 내보인다. 쇤베르크는 피에로의 결연한 죽음을 형상화하기 위해, 밤의 달빛을 자신의 눈과 의지로 품은 기이하고 모호하지만 지극히 선명한 발광을 묘사한다. 자신만의 무대로 나아가는 결연한 의지. 그리고 이 의지의 힘은 자신이 쌓아올린 삶의 단계들로 가로지르고 해체하며 죽음이라는 순수한 마무리에 도달한다.
피에로의 죽음이든 변박의 축대가 무너지는 사건이든, 이미지와 음악의 서사가 죽음을 다루든 말든, 이미지는 그 자체로 현재를 정박하고 박제시키는 죽음의 매체이다. 음악 또한 시간의 흐름을 간직하려 노력하지만 결국 현재를 호명하지만 다시금 종말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예술이 된다. 따라서 이미지의 이미지, 음악의 음악을 다루는 예술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그 이후의 의미를 다룰 수 밖에 없다.
1장 이미지에 놓인 비스듬한 사각형 단의 개별 이야기가 시작된다. 2장의 이미지는 사각의 단면, 그것들의 이어짐, 교차와 불연속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인 율동이 아닌 리듬과 박자의 추상화로 표현된다. 그러게 함으로써 이 이미지는 해석자의 시점을 여전히 관조적인 상태로 머물게 만든다. 그리고 출렁이는 움직임에 대한 거리두기를 형성하여 일상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스스로를 망각하고 직관 속으로 침윤해 들어가는, 주어진 현실의 시공간을 전제하지 않고, 사태 자체로 접근하게 만드는 ‘미적 관조’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특수한 생활조건에서 트로트는 미적 관조를 안내하는 배경음악이 된다. 고속도로 휴게소, 시골의 오일장터에서 트로트는 낯선 방문자에게 그 환경이 지닌 특질과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트로트에서 우리는 사랑과 연애의 끈질긴 욕동이 아닌, 그곳의 풍경과 삶의 질곡으로 풍덩 빠지는 느낌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것의 참과 거짓 그리고 좋고 나쁨의 성질, 어떤 경우에는 인생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려는 인식적 노력을 전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바라보고 이를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 1장의 이미지에서는 삶과 죽음을 변박의 논리로 증명하려했다면 2장의 이미지는 그 안의 교착점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여 그 속에 내재된 분위기를 압축하여 형상화하는데 집중하였다. 트로트가 2장의 이미지에 대한 적절한 병치가 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트로트가 지금의 우리에게 무관심성의 대상이 되고 관조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배경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트로트는 지난 세월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울려퍼지고 소비되어서 매너리즘 자체가 그 장르의 본질인 마냥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이 하루라도 변화하지 않으면 큰 일이 되는 도시 문명과 달리 무엇이든 변화하게 되면 큰 사건이 되는 시골의 특성과 어우러져 트로트는 도시 방문자에게 그 장소의 분위기에 곧장 빠져들게 만드는 미적 관조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3장의 이미지는 정수의 파동과 파이의 진동이 서로 엇갈려 만들어내는 변박의 회화를 표현한다. 변박의 회화는 유동적인 타원으로 자신만의 색을 품어내기도 하며 때로는 무채색의 거칠고 딱딱한 검은 사각형들이 점층적으로 반복되기도 한다. 유동성과 딱딱함이라는 시각적 키워드는 20세기 회화의 역사에서 그 참조점을 찾을 수 있다. 추상주의의 경전으로 자리잡은 몬드리안과 말레비치의 대칭성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의 대칭성이 변박의 회화에서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의 주관성에 대한 신념을 담은 몬드리안의 회화, 이에 대한 대척점으로 감성의 절대화를 지향하는 말레비치의 회화. 파동과 진동의 자연스런 교차 가운데 피어나는 변박의 회화는 추상주의 미술사가 드러내 보인 양극적 신념을 유동적인 타원과 딱딱한 사각형으로 변주한다.
파동과 진동의 교차가 만드는 변박의 자유로운 회화, 그러나 동시에 고매하고 순수한 압축적 본질을 드리우는 이 이미지는 전설적인 재즈 음악가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의 <타임아웃, Timeout>과 많이 닮았다. 브루벡은 50년대의 재즈계를 지배한 쿨(Cool)의 단조로움을 극복하는 다조성의 공을 제시했다. 이 곡은 명백하게 복잡성을 주제로 하며 선율의 다양한 콜라주를 통해 임의적이지만 여러 형태의 압축적이고 인상적인 구조를 선보인다. 복잡성을 다루면서 전혀 혼란을 주거나 애매한 태도로 서 있지 않고, 실현 가능한 - 설령 그것이 임의적이고 일시적이라해도 - 매력적인 음의 질서를 보여준다. 마치 몬드리안과 말레비치라는 대칭적 존재가 합을 이루어 만드는 현대 추상주의 미술사의 위대한 광경처럼 말이다.
사실 변박을 운용하는 캔버스든 이미지든 음악이든, 그것이 지닌 중요한 함의는 변박 자체가 아니다. 일상성의 공간이 지닌 뻣뻣함을 변박의 돌출로 평평하고 유연하게 만드는데 큰 목적이 있다. 때론 변박의 운용이 의미 없는 콜라주와 지루한 반복을 시연하기도 하지만, 브루벡의 곡처럼 적절하게 활용된다면 일상에 숨겨진 감각들의 여러 진실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압축성(Abstract)의 이미지 사유는 아마도 산등성을 처음 올라가는 것과 같다. 전체를 경험하고 내려다보기 전, 이를 회고하고 그것들의 진위를 정확하게 깨닫기 전, 어쩔 수 없이 추상적으로 전체를 가늠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감각의 강도는 그 어느 단계보다 가장 강렬한 등산의 첫 단계와 닮은 것이다. 이 단계의 본질적 특징은 그 감각이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강도로 다가오기에 전체를 온전하게 느끼는 단계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전체를 제대로 바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이해 수준에 머문다는 아이러니에 있다. 따라서 단순한 구체도 추상도 아닌 압축적인 덩어리들로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압축성의 단계를 벗어나면 서서히 춤사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춤사위는 첫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돌이킬 필요가 없는 그리고 두번 반복하기 어려운 움직임의 역사를 개진한다. 즉 작은 발걸음과 제스처 하나 하나가 일상을 뒤흔드는 변박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이다.
변박의 진동을 실어나르는 음계가 나타난다. x축과 y축의 음계에 의해 일정한 형체가 없던 변박의 회화에 동그랗고 단단한 타원들이 서로를 상응하며 진동한다. 타원의 움직임에 맞추어 익명의 무용수들이 원초적 춤사위를 펼치며 축제를 개시한다. 크고 작은 움직임은 변박의 진동을 통해 뻣뻣한 일상성을 풀어헤치는 시도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형식 안에서 작동하는 움직임, 타이포와 음계가 하나의 레이아웃으로 줄 세워진 공간에서 펼쳐지는 움직임이다.
일상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지극한 반복을 외견적 특질로 삼고 있지만 반복의 연속성 때문에 우리는 좀 더 높은 층위의 명상적 시각을 검토할 기회를 갖는다. 가능성의 세계는 일상의 지루한 연속과 반복으로부터 불가능성을 포착하고 이에 다가갈 때 나타난다. 그렇기에 일상은 결코 지루하기만 한 공간이 아닌 것이다.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의 <아기 예수를 향한 스무가지 시선>은 이러한 불가능성의 오묘하고 무의식적인 매력을 물씬 표현한 곡이다. 그는 이 곡을 통해 소박한 일상성을 뒤흔들 수 있는 불가능성의 매력적 폭력을 다양하게 시도한다. 일상의 레이아웃에 침범하고 자기만의 음절을 만드는 변박의 파국들은 2막 1장 이미지 속 무용수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본 장에서 돌입되는 이미지 사유의 모습은 이전보다 더 처절하고 직설적이다. 무용수들의 구체적 상은 그들이 펼치는 절규의 드라마로 대치되었다. 화려하기만 했던 실험과 도전은 입 속의 검은 입으로 삼켜진다. 이미 자신의 몸은 검게 묽들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용수의 움직임은 더욱 처절한 드라마로 진화해 간다. 앞 장의 시도들이 결국 검은 죽음을, 무대가 해체되는 바로 이 순간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나 무대가 끝난 어둠 속에서 무용수의 드라마는 보다 선명하게 발광한다. 변박적 시도는 무(無)로 수렴하지 않고 온전하게 자기만의 실존적 빛으로 변형되어 간다.
장삼이사의 육화된 목소리와 그것의 음악적 형태를 부여한 정태춘이야말로 변박적 실존을 체화한 음악가가 아닐까 싶다. 특히 변박적 고통들을 일상적인 프레임으로 묶어두며 그것의 이야기를 절절히 보여주는 <사람들> 시리즈는 매우 완성도가 높다. 이 곡에서 정태춘은 낮은 이들을 압착하는 한국 사회의 검은 일상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발굴하고 이로부터 이 땅에서 구원해야할 실존적 빛남이 무엇인지를 거의 완벽하게 묘사한다.
자신만의 실존적 흔적을 남기는 변박적 춤사위 이후에는 무엇이 도래하는가. 발광하는 무용수와 우리들은 무의식적 에너지를 온전히 소모한 후에야 지나간 길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도대체 우리의 여정은 왜 시작되었으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언제나 과거가 될 수밖에 없는 무용수의 현란한 춤사위는 결국 미래를 도모하는 보기 좋은 성찬이 된다.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이 장소는 다시금 우리가 삶을 도모하기 위한 일상의 공간이 된다.
막장의 배경은 결국 가장 정박적인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본래의 전박지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낮과 밤이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처럼 변박의 축제와 진동은 일상의 또 다른 기록으로 가지런히 새겨질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모든 시도가 현재라는 동시성을 박탈하여 생동감을 잃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무용수의 변박적 춤사위는 정박의 레이아웃 위에서 새로운 시간의 이행을 준비하는 ‘&’의 기표 위에 놓여진다. &의 기표가 지닌 기의적 힘은 무엇이든 결합시키는 마술적인 힘이다. 따라서 변박적 움직임의 최종 단계에서 이미지의 무용은 자기 자신을 위한 새로운 개방성의 영역을 &을 통해 주문한다. 그러나 이는 무규칙과 혼돈을 무기로 삼는 무차별적 개방과 접속이 아니라 자기만의 논리와 주제 의식을 선명히 전달할 줄 아는, 그 나름의 과학적인 변박으로 진화해 갈 것이다.
낯설고 불편한 혹은 어려워서 낯선 것들을 탐구하고 구현하려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호기롭고 즐겁다. 그런데 마술적인 것을 실체적인 말과 글로 그리고 리듬과 이미지로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1cm의 정확함과 디테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되새길 필요가 있다. 밴드 도도어스의 두 번째 싱글 <라이프리스, Lifeless>가 바로 그러한 예다. 변칙적인 실험 아래 숨어 있는 고도의 무의식적 계산은 도도어스가 그간 창작의 도전 속에서 충실히 채워온 것들이다. 그렇기에 변박이라는 실험 속에서 도도어스는 조화로운 리듬이 무엇인지 정확히 찾아내어 이를 세상에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대의 에필로그는 그동안 객체로서 우리들의 관찰 대상이 되었던 무용수들이 자신만의 축배를 벌이는 이미지다. 그들이 사유 이미지 속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쌓아올린 진실들을, 이미지라는 그릇에서 벗어나 내일의 광명을 열어젖히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천천히 빛과 어둠 사이로 뚫고 올라 자신을 위한 메타적 움직임을 선보인다. 변박이라는 커다란 제목을 십자가 삼아 다음의 변신을 예고하는 그들의 전주곡이 무대 안팎으로 흘러든다.
스스로 변박적 존재가 되어 응고된 일상에 낯선 울림을 자아내고 나아가 잠자는 이들을 위한 기쁨과 사랑의 심볼이 되는 것.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불새>는 이러한 존재에 대한 최고의 음악적 성찬이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깊은 환상을 심어주는 존재로서 불새는 변박과 정박의 신묘한 리듬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지금까지 다룬 사유 이미지는 본래 변박(Irregular Time)에 대한 다양한 그래픽 실험이다. 어떤 서사적 줄기 혹은 일관된 의도를 마음에 두고 작업한 이미지가 아니라 오직 ‘변박’이라는 심상을 놓고 개별적인 연상과 상상을 통해 마구잡이로 만들어낸 이미지 모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단단히 서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의미 연관을 허용하는 사물만큼 이미지 또한 언제나 그대로이면서 매번 그 의미의 완성에 대한 유보적 입장을 갖게 만든다. 이런 이미지의 성격으로 인해 두서 없는 변박의 이미지들이 때때로 하나의 서사적 가능성을 내게 비춰주는 것이다. 발견된 이미지의 서사는 다음과 같다. 변박적 움직임에 관해 직접적으로 파악된 것들 - 아직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정의내리기 힘든 까닭에 - 이를 최소한의 이미지로 압축하고, 그 이미지들의 프리즘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록하며 종국에는 변박과 정박의 조화와 기쁨 그리고 그것들의 향연으로 마무리 짓는 이야기. 결국 변박의 진동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무겁게 흔들지만 동시에 삶의 공간에 커다란 생기를 가져온다는 사실. 사유 이미지가 뻗어간 자리에 남은 교훈은 대체로 이렇다. 이러한 방식 즉 서사적 연결점을 포착하고 이를 글과 음악이라는 고전적 질서 아래에 묶어두는 일. 이것이 THINK IMAGE PROJECT에서 발굴하고 창조하려는 ‘사유 이미지’를 위한 하나의 실천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