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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배구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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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Jul 09. 2022

내가 왜 배구를 배우기 시작했을까?

그것도 운동이라곤 질색해온 평생을 외면한 채, 갑자기 35살에 말이야.

작년 초의 나에게 '내년의 넌 배구를 배우고 있을거야. 그리고 그걸 못해서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고 있어' 라고 말하면 아마 믿기나 할까? 

일단 두 가지 근거로 믿지 않을텐데, 35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인의 의지로 운동을 해 본 적 없던 내가 스포츠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이게 일도 아니고 못하면 그냥 관뒀을 텐데 구태여 스트레스까지 받으면서 붙들고 있다는 면에서 의심할 것이다. 

그리고 굳이 평일 저녁에 한시간 반을 걸려서 배우러 간다는 이야기도 듣고나면 그게 나 맞냐고 두어번은 확인해볼지도 모르겠다. 




시작은 사소했다. 아, 배구를 배우게 된 시작이 사소하게 된 게 아니라 배구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정말로 우연히 여자배구 리그에 신생 팀이 생긴다는 소식 덕분이었다. 상실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나에게는 무엇이라도 몰입할 게 필요하고, 마침 그 때 나에게 끝없이 여자배구에 대한 정보를 주입해주던 친구가 있었다. (분명히 나한테 직관 다니자고 몇 달을 꼬셨는데 막상 내가 여자배구에 빠지게 된 후 그 친구와는 다른 이유로 관계가 멀어졌다..)


그리곤, 여자배구 V리그가 시작하자마자 나는 속절없이 빠져버렸다. 퇴근하면 바로 여자배구경기부터 틀어놨고 새벽에는 과거 경기를 보기 시작했으며 주말에는 각 배구팀의 유투브를 전부 보면서 마치 무슨 배구팀 전력분석관이라도 된 마냥 덕질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룰도 제대로 모르고 저게 왜 아웃인지도 몰랐으며 그냥 공 쳐서 넘어가면 점수가 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응원하는 팀이 생기고 사랑하게 된 선수가 생기니까 이제는 하나 하나 배구의 룰이 궁금해졌다. 왜 분명히 공격이 잘 들어간 것 같은데 아웃이 된거고, 네트를 건드리지 않은 것 같은데 터치넷이 되어버렸고, 외국인 선수는 보통 어떤 포지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선수들과 같이 기뻐하고, 같이 분해하고, 누군가 잘 해냈을 때 진심으로 벅차오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부터 나는 아예 여자배구 뿐만 아니라 여성 스포츠팀에 빠져들게 되었다. 빠져든다는 단어를 자주 쓰고싶지 않은데 뭔가 신선한 단어로 나의 이 신성한(!!!) 덕질을 표현하고 싶은데 다른 뉘앙스가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여성 야구선수도 좋아하고 여성 유도선수도 좋아하고 노는 언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즈음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 심지어 회사 팀원들까지도 내가 여자배구에 반미쳐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나는 벅찬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여성들간의 피튀기는 경쟁, 뒷모습에서도 느껴지는 승부욕, 신체적으로/물리적으로 어느 한 분야에서 끝없이 최고를 추구하는 모습은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느끼지 못했던 쾌감이고 카타르시스였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한게 좋아하고 동경하는 사람들을 보다보면 나도 그렇게 되고싶어진다. 어떠한 시점인지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나는 구기 스포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오만하게도 어쩌면 나에게 재능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쥐구멍이 아니라 플랑크톤 구멍이 있어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참담한 수치심이 들지만, 정말로 그랬다. 


처음엔 풋살 원데이 클래스를 들었다. 공이 발에 제대로 맞았을 때 기분이 정말 좋았지만, 나의 이 허접한 체력으로는 한 경기의 절반도 뛰어다니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여름/겨울에 야외에서 연습을 할 자신이 없었다. 이 나약한 인간 .... 하지만 나에겐 아직 농구가 남아있었다.


혹시나 농구는 잘할지도 몰라 하는 마음으로 농구 원데이 클래스도 들어봤다. 실내 스포츠라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고(쯧쯧..) 코트 크기도 적당하다고 (초반 10분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지옥의 달리기와 드리블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적당히 몸싸움을 하면서 상대방에게서 농구공을 뺏어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쭈뼛거리면서 상대방의 주위를 맴돌다가 힘없이 슛을 먹거나, 공을 뺏기거나 했다. 역시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적당히 못했으면 모르겠는데, 나는 정말로, 심각하게, 같이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못했다. 


그 때 나에게 찾아온 한줌의 희망. 그럼 혹시.... 배구는 어떨까?

배구는 실내 스포츠고, 각자 위치에서 리시브/공격/수비를 하는 거니까 남의 공을 뺏어올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일단 나는 배구를 좋아하니까! 계속해서 하고 싶다는 동기부여도 되지 않을까?

그래. 배구야. 배구가 나의 가능성이야!! 하고 마음먹었을 땐 알지 못했다. 


내가 나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몸치였다는 걸. 하나의 스포츠를 못한다는 건 다른 스포츠를 못할 확률이 아주 높다는 걸 나는 정말로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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