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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ug 05. 2019

뒷맛을 아는 인간

삶의 MSG 

뒷맛을 아는 인간


나는 음식에 있어서 자연친화적인 것만이 옳고 좋다는 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얼마간의 MSG는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어떤 순간에는 MSG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심지어 요즘 시대의 ‘집밥’조차도 일체의 낭만과 감성을 걷어내면 MSG의 점철일 것이 뻔한데. 가끔 산장을 닮은 음식점에서 곤드레 비빔밥이라든가 유기농 나물 무침 같은 것들을 먹고 나면 담백하고 개운해서 참 좋다 싶다가도 매일 먹긴 아쉽다는 생각이 대번에 이어진다. 맛에 있어서는 황교익보다는 백종원 편이랄까. 나는 맛 자체의 순수함이나 본질보다 내가 느끼는 맛의 감각, 그 만족감이 더 중요한 인간이다.


어릴 땐 어른들이 으레 하던 “미원 들어간 음식은 느끼하고 속이 받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논리나 추측의 영역이 아니라 감각의 영역이라서, 미원 맛 자체를 느끼지 못하던 나에게는 모국어이되 배운 적 없는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미신 같기도 하고 루머 같기도 했던 ‘미원 맛’은 이십 대 중반을 넘겨 문득 찾아왔다. 


자주 가던 학교 앞 두루치기 가게였다. 누린내 없는 고기는 부드럽고 채소도 적당히 아삭하니 잘 볶아졌다. 같이 나온 된장찌개의 국물은 시원하고 건더기도 푸짐하다. 갓 지은 밥과 먹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분명 맛있는 식사였는데 그날따라 가게를 나서는 입안이 영 찝찝했다. 음식을 삼킨 뒤, 혀뿌리 근처에서 느껴지던 오묘한 뒷맛. 어른들이 말하던 미원 특유의 느끼함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닫혀있던 감각이 열린 것만 같은 기분. 본가에서 나와 자취한 지 3,4년쯤 되자 혀의 미뢰들이 MSG에 이골이라도 났던 게 아닐까. 


어떤 사실이나 감각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텐데. 만약 미원 맛을 몰랐다면 맛있게만 먹을 음식들인데, 이제는 분별이 생겨버렸다. 좋게 말해 탐식에서 미식의 영역으로 몇 mm쯤 가까워졌다고도 할 수 있지만, 조금 귀찮아진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입에 넣자마자 느껴졌다가 물 한 모금에 씻기는 ‘앞맛’과 달리 뒷맛은 식사가 끝난 후에 슬그머니 배어 나오기 시작해서 꽤 오래 머물렀다. 미원의 뒷맛은 불규칙한 주기로 강해질 때가 있어서, 딱히 건강식을 추구하는 편이 아니면서도 미원을 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뜨끈한 쌀밥과 3,4가지 밑반찬만으로 끼니를 때운다. 그 밑반찬에 미원이 전혀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먹으면 식후에도 입이 개운했다.    


처음 미원의 뒷맛을 느끼고 또 6년쯤 지났다. 여전히 나는 미식보다는 탐식에 머물지만, 그동안 삶의 뒷맛도 조금은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자주 왕래하며 지내던 사람과 소원해지고 난 뒤, 그제야 느껴지던 ‘관계’의 뒷맛. 돈 버는 맛에 취해 대입 자기소개서를 첨삭해대다가  학생들의 절절한 눈빛에 번뜩 정신을 차리면, 내가 뭐 하는 건가 싶은 ‘일’의 뒷맛. 글 쓰듯 꾹꾹 눌러 뱉지 않고 경솔하게 나불거리다가, 뒤늦게 입을 다물어도 지워지지 않던 ‘말’의 뒷맛까지.


삶의 뒷맛은 대부분 떫고, 종종 눈물 날 만큼 매웠다. 그 뒷맛들 덕에 삶이 조금은 귀찮고, 그보다 더 많이 아름다워졌다. 당장에 느껴지는 삶이 앞맛에 취해 오만하고 뻔뻔하게 살 뻔했는데, 뒷맛의 감각이 열린 덕에 그나마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는 것이다. 여전히 MSG를 끊어버리지 못하는 건 음식에서나 삶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가끔 그 뒷맛이 속에 받쳐 괴로운 날엔 소박하고 정갈한 인간이 되어볼 수는 있다. 


뒷맛을 아는 인간, 이라고 불러보면 꽤 그럴듯하기도 하고.   




서른과 어른을 위한 에세이 
<서른이 벌써 어른은 아직>
 브런치 책방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publish/book/1718


그 외, 책 <서른이 벌써 어른은 아직> 구입처

교보 문고 : http://mobile.kyobobook.co.kr/showcase/book/KOR/9791187229254

반디앤루니스 : https://bit.ly/2QYkNnC

yes24 : https://bit.ly/2R1hEDK

인터파크 : https://bit.ly/2RaP96H

영풍문고 : 온라인에서 '서른이 벌써 어른은 아직'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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