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바야, 우바야

소리 내어 울지 못한 새벽

by 김경빈

10여 년 전 우리 가족은 김해 홍익아파트에 살았다. 가파른 비탈길에 엘리베이터 없는 6층짜리 아파트 12개 동이 줄지어 서서 단지를 이룬다. 1990년 7월이 첫 입주였다고 하니 벌써 30년도 더 지난 아파트다. 우리 집은 비탈길 중에서도 가장 윗동, 그중에서도 가장 위층인 6층이었다.


고된 귀갓길이 뻔한 집이었다. 봄에는 길을 따라 만개한 벚꽃을 올려다보는 낭만이라도 있었지만, 여름과 겨울엔 그야말로 매일이 체력 훈련이었으니까. 해서 우리 가족은 ‘나간 김에’ 마인드가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었다. 나간 김에 은행 일도 보고 친구도 만나야지. 나간 김에 필요보다 더 넉넉하게 장을 봐야지. 나간 김에 할 수 있는 건 일단 다 하고 와야지.


그래서였을까, 홍익아파트 부엌 한구석 유난히 그득했던 주전부리 바구니는 바닥 드러낼 줄을 몰랐다. 가끔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엄마는 “그 고바위에 살면서도 왜 살이 안 빠졌을까?” 의아해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다. 우리 가족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동면을 준비하는 동물처럼 주전부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몸은 마음이나 기억보다 정직하다.


모 중견기업 회장의 별장 관리인이었던 아버지는 격일로 일하셨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 내일 아침에 퇴근해서 모레 아침에 다시 출근하는 루틴이었다. 퇴근 날 아침이면 엄마는 식사를 준비하고 나는 베란다 창에 기대어 밖을 내다본다. 9시쯤에 멀리서 아버지의 차 소리가 들린다. 차종은 기아의 경차 모닝. 아담하고 흔한 차인데 이상하게 소리만으로도 아버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슬리퍼를 신고 1층으로 마중을 나간다.

아버지는 퇴근할 때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별장에서 물을 길어왔다. 물이 가득 담긴 20리터 말통은 6층까지 들고 오르기엔 꽤 무거웠다. 가끔은 이런저런 공구나 회장이 입지 않는 명품 옷가지들도 챙겨 오셨다. 나는 1층에서 주차할 공간을 미리 봐 두고, 주차된 차에서 물통과 짐을 꺼내 들고, 아버지와 함께 6층 계단을 올랐다. 간밤의 사나웠던 날씨, 엄마가 아침으로 준비한 메뉴, 아직 드러누워 자고 있을 동생, 목욕탕에 갈 시간 따위를 이야기하다 보면 금세 6층. 열어둔 현관문으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찌개 냄새가 흘러나왔다. 아버지와 함께 오르는 6층 계단은 힘들지 않았다.

귀갓길이 이토록 험난하니 늦게까지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으면 엄마는 잠을 자지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술을 진탕 마시면 맨발로 공원을 걷거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엄마는 그 꼴을 굉장히 싫어했다. 걱정과 원망이 뒤섞이다가, 어느 순간 원망이 더 커진 표정이었다.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건 내게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럴 땐 나도 아버지가 미웠다.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가끔 내 손으로 만취한 아버지를 부축했다. 비 오는 새벽, 맨발로 걷겠다는 아버지를 위해 젖은 신발을 들고서 걸음이 상하지 않도록 길을 살핀 적도 있다. 아버지를 침대에 눕힌 뒤 양말을 벗겨주거나 변기에 구토하는 등을 두드려준 적도 있다. 몇 번 그러고 나니까 아버지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너무 무르고 서러웠다. 아무리 호탕하게 웃어도 눈매가 서글펐다. 내가 술에 취해 울면 꼭 저런 표정일까 싶어서,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꽤 쌀쌀했던 어느 가을밤. 그날도 아버지는 새벽까지 연락이 없고 엄마는 안방에 앉아 애꿎은 TV 화면을 쏘아보고 있었다. 같이 술을 마신 친구는 1시간 전에 헤어졌다는데 어쩐 일인지 아버지는 소식이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고 멀리서 술 취한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새벽의 고요는 불안을 키웠다. 일단 나가서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6층에서 5층으로, 5층에서 4층으로 내려가는데 문득 어떤 소리가 들렸다. 흐느끼는 건지 흐느낌을 참으려 애쓰는 건지 모를 소리.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가다 층계참 구석에 무릎을 세운 채 고꾸라진 아버지를 봤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만 옅게 떨고 있었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 계단 창으로 든 달빛이 여릿했는데, 그 빛을 넘어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소매가 축축하게 젖은 아버지를 반쯤 들쳐 메고 다시 4층에서 5층으로, 5층에서 6층으로 올랐다. 술에 취하면 나를 앉혀놓고 1시간 넘도록 철학적인 말들을 늘어놓던 아버지는, 그날 잠잠히 누운 뒤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곧바로 잠든 건지 마저 흐느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의 퇴근길을 마중하는 내게 3층 층계참은 늘 조심스러웠다. 그곳은 축축하고 서글퍼서 발을 헛디디면 쉽게 고꾸라질 것 같았다. 고꾸라지면 꼭 아버지처럼 울게 될 것만 같았고, 그 마음을 알게 될까 봐 조금 두렵기도 했다.


아버지에게도 마음껏 울어도 괜찮았던 아주 어릴 적이 있었다. 60년도 더 전에, 아기였던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꼭 “우바야, 우바야” 하는 것 같아서 우바야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그날 층계참에서 아버지는 우바야, 우바야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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