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전하지 않는 말

아버지와 아들

by 김경빈

서른도 중반에 이르러 가까스로 배운 것 중 하나는, 많은 가치들이 양가적이라는 점이다. 그중에는 물론 사랑도 포함된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속에는 함께 존재해선 안 될 감정들이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뒤섞여 있다. 원망과 그리움, 이기심과 이타심, 경멸과 존경이 동시에 마음속에 움틀 때, 사랑은 이제 사랑한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사랑도 그렇게 불가해한 방식으로 자라났다. 혈기왕성한 청년이자 아내를 울리는 남편이었던 아버지. 법문과 성경과 오쇼 라즈니쉬의 책을 탐독하는 철학적인 인간이었으나 부부 사이의 사소한 관계에는 서툴렀던 아버지. 황당할 정도로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다가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었던, 아버지.


결혼 후에 아버지와의 물리적 거리는 조금 멀어졌지만, 정서적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다. 보름달이 뜨면 며느리의 눈이 떠오른다며 전화 주시는 아버지의 다정함이 좋다. 환갑을 넘겨서도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고 더 성숙해지려 노력하시는 태도가, 뒤늦게나마 엄마를 최우선 순위로 챙기며 오순도순 황혼의 초입에 들어서는 모습이 좋다. 물론 더께로 쌓인 감정의 골을 한 겹씩 들추면, 아버지도 나도 서로에게 풀지 못한 숙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숙제들은 풀지 않은 채로 두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어떤 숙제들은 풀지 않는 것이 숙제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며칠 전 밤, 아내와 처제네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유독 보름달이 크고 환했다. 보름달 사진을 찍어 아버지께 전송하고서, 이어 전화를 걸었다. 받자마자 호탕한 웃음에 나도 마음이 놓여 별일 없으시냐 물었는데, 어색하게 뜸을 들이시더니 코로나에 확진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버지는 3일째인데, 무증상이라 아무렇지 않으며, 오미크론은 감기나 매한가지라는 말을 다급하게 이어갔다. 불행 중 다행이기도 하고, 다들 큰 병치레 없이 지나간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몸조리 잘하셔야 한다는 무력한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고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인어른, 장모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 두 분은 코로나를 피해 잘 지내고 계셨다.

역지사지로 내가 코로나 확진이 되었어도 굳이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겠지만 확진된 지 3일 만에, 그것도 문득 건넨 안부 전화로 확진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사랑도 괴로움도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인데, 이제 괴로운 일들은 굳이 전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가는 듯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부모님의 조용한 속앓이가 다행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우리 부부, 우리 가정을 제대로 살피기도 바쁜데 부모님의 사사로운 감정과 괴로움까지 모두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다곤 해도 역시 이런 식으로 묵은 아픔이나 괴로움을 뒤늦게 알게 되는 건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굳이 전하지 않는 말들이 쌓여 서로의 미안함이 되고 애틋함이 된다. 나는 점점 더 미안하고 애틋한 자식으로 늙어갈 것만 같다.


부모 자식 간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믿을 게 못 된다. 무소식은 결국 견딜 만한 괴로움을 티 내지 않고 견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이제는 무소식이 종종 두려울 때도 있다. 견디기만 하다가 듣는 이 없이 혼잣말을 하게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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