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별을 결심하는 일

이별의 의미를 곱씹다.

by 김경빈

‘결심(決心)’이라는 단어를 곱씹는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마음을 정한다’ 정도인데, ‘결심하다’라는 표현의 어조가 더 강하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사소한 일에 결심이라는 말을 가져다 쓰기엔 아무래도 민망스럽다. 매번 실패했던 다이어트를 시작하거나,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을 다짐하거나, 퇴사와 이직을 실행에 옮기는 일 정도는 되어야 할 듯싶다. 결심이란 결국 몸과 마음과 상황을 일순간엔 바꿔보겠다는 의지,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살겠다는 각오에 힘주어 느낌표를 찍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심을 실천해 ‘오늘과 다른 내일’을 진정으로 살아낸다면, 그건 ‘오늘과 이별한 내일’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다. 지금까지의 날들과 자진해서 이별하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것이다. 어떤 이별은 이토록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형태를 지닌다. 나이 드는 일이나 갑작스러운 연인의 이별 통보처럼 잠자코 앉아서 당하기만 하는 이별만 이별인 것은 아니다. 삶의 어느 순간이 되면, 누구나 여러 종류의 이별을 결심하게 된다.




서른 중반에 이르러,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이별의 결심을 하나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결혼’이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운명 공동체가 되기로 약속하는 일임에는 분명하나, 동시에 많은 것들과 이별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게 결혼은 스물에 만나 11년을 이어간 연인 관계와 이별하는 일이었고, 치기 어린 문학청년의 자아와 이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부라는 이름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 부모의 가치관과 이별을 결심하는 일이었다. 세간의 표현으로는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겠으나, 그것은 훌훌 털고 제 살길 찾아 떠나는 자식의 표현일 뿐이다. ‘내 아들의 여자, 내 딸의 남자’라는 표현이 여전히 공공연한 것을 보면 부모에게 있어 자식의 결혼과 독립이란, ‘내 아들, 딸과의 이별’로 먼저 와닿는 일인가 보다. 게다가 그 아들과 딸이 딩크로 살겠다고 선언한다면? 어쩌면 손주로 다시 이어질 수 있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끈마저 놓치는 기분이 들 것이리라.

그런 연유로, 우리 부부의 결혼 탓에 힘든 결심을 떠안아야 했던 건 오히려 양가 부모님이었다. 나는 결혼식을 몇 개월 앞둔 어느 주말에 본가에 가서 “자녀 계획은 없어요”라고 대뜸 일러두었다. 결혼 후에 변명인 듯, 해명인 듯 둘러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주로 효도한다’라는 말에 담긴 맥락은 이해하지만, 그런 이유로 아이를 갖고 싶지는 않았다.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래도 부모님께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아서 아내와 둘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 것인지 사족을 달았다.

늦둥이 동생부터 여러 사촌 동생들까지, 어릴 적부터 아이들을 예뻐하고 좋아했던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의 두 눈에는 의심과 당황이 차올랐다. 눈빛을 읽힐까 싶어 괜히 부엌으로 들어가며 “느그 둘만 잘 살면 되지. 그래, 그래라.” 하시던 엄마의 둥근 등에 설핏 그늘이 졌다. 안방에 앉아 TV를 보시던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다가 현관을 열고 나가서는 헛기침과 긴 한숨을 섞어 담배를 몇 개비씩 태우셨다. 30분도 더 지나 들어온 아버지는 “그래, 요새 젊은 친구들이 아기 안 낳고 그렇게도 잘 산다카데. 그렇게 살믄 또 그 나름대로의 행복을 배울 수 있겠제. 아부지는 아무 신경 쓰지 말고, 니 와이프가 하자는 대로 해라.”라고 하셨다.

그날은 그렇게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유난히 무겁고 짙었다. 그렇다고 번복할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의 표정과 눈빛에 속속들이 박힌 일말의 기대감까지도 가지런히 현관에 접어두고서 본가를 나섰다. 그건 부부로서 부모에게서 독립하기 위한 자식의 결심이자, 당신의 삶에서 자식의 삶을 떼어내 이별하기 위한 부모의 결심이기도 했다. 그날 두 분은 아마도 하기 싫은 결심을 굳게도 하셨을 것이다.




올해로 결혼도 벌써 4년 차에 접어들었다. 여전히 우리 부부는 둘이다. 둘이서 오롯하게 행복하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나의 온 사랑을 전할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사실이 좋다. 잠들기 힘든 새벽에 굳이 잠들려 하지 않고 거실에 나와 영화를 보거나, 그러다 1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드는 것도 좋다. 조카들에게 사랑만 마음껏 전할 수 있는 이모와 이모부라서 좋고, 집으로 돌아와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긴다면’이라고 시작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 상상의 끝에서, 우리는 이런 결심을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의 행복과 괴로움, 애정을 감싸는 원망, 희망과 손잡는 후회, 그 모든 것들과 이별한 것을 잊지 말자고. 스물에 만난 두 사람이 나이 들며 깊어지는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보자고. 아이가 없는 부부로서 서로의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자고.

부모님께 던진 “자녀 계획은 없어요”라는 말은 “절대로 자녀를 갖지 않을 겁니다!”처럼 과격한 선언은 아니었다. 다만 이대로 둘이어도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여태 이어진 것뿐이다. 이러다 어느 날엔 우리 부부의 생각이 바뀌어서 아내와 나를 조금씩 닮은 아이의 부모가 될 수도 있다. 그땐 또 다른 결심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아이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빚은 결심과 ‘우리 아이와 함께 행복해지고 말겠다는 마음’으로 내린 결심의 무게감은 확연히 다를 것이다. 평생 자식으로만 살던 인간이 부모가 되기 위한 결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건 ‘딩크 부부’와 이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일 것이고, 좋은 일이 되도록 살아가야 할 것이다. 결국 삶이란, 후회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이별의 의미를 곱씹는 일의 연속이다. 이별의 의미를 곱씹는 동안, 삶도 사랑도 더 깊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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