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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에게 미신의 존재를 설득하기는 어렵다. 애초부터 단어가 과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 않은 걸 믿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과학으로도 진실을 가릴 수 없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난다. 영화는 시각 매체기에 이걸 전달하기 딱 좋은 매체다. 특히 오컬트(초자연적인 현상) 영화라면 더더욱.
간만에 영화관을 붐비게 한 작품이 나타났다. 23일 향수시네마 마지막 상영 회차도 관객이 절반 넘게 채웠다. 주말 CGV 대전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2월22일 개봉한 ‘파묘’의 효과였다. 개봉 일주일이 되기 전에 관객 수 300만명을 달성할 예정이다.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에 흥행한 영화들의 파죽지세가 느껴질 정도다.
장재현 감독은 오컬트 영화라는 외길만 걸어왔다. ‘검은 사제들’, ‘사바하’ 그리고 이번 작품 모두에서 오컬트, 종교, 제의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연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영화가 크게 흥행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관객의 갈증을 채워준 감독의 야심과 치밀함도 크게 한몫했다. 어쩌면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느끼고 싶은 것은 스크린 바깥을 뚫고 나오는 제작진들의 치열한 노력일지도 모른다.
미국에 이주한 가정의 남성들에게 이유 알 수 없는 환청 증세가 나타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당 화림과 봉길, 풍수사 상덕과 장의사 영근이 합류한다. 이주가정의 조상 묘가 있는 강원도 선산에 찾아가 이장을 진행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관이 열리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컬트 장르는 그 자체로 신비로움을 가진 하나의 수단이다. ‘검은 사제들’은 주인공의 트라우마 극복과 진정한 종교인으로 거듭나는 서사, ‘사바하’는 살해당하고 묻혀 있던 존재들의 진실을 알아냄과 신의 침묵을 ‘곡성’도 신의 침묵과 삶의 부조리를 다뤘다. ‘파묘’는 돈의 관계가 불가해한 외부(혹은 발밑)의 재앙에 맞서면서 유대관계로 더 끈끈이 연대하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오컬트 장르를 빌려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한다’라는 소명의식, 책임감으로 현실 속 한의 정서를 어루만진다. 영화에선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이라는, 일본에 대한 우리 사람들의 한이 가장 많이 도드라져 보인다. 주인공들의 책임감에 감동하며, 상덕이 일본 귀신의 목을 벨 때 쾌감을 느낀다.
영화 후반부의 서사에 일본 대신 세월호, 이태원과 같은 우리 안의 사회적 참사를 대입해 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누군가의 소명의식으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대체 역사가 된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 우리나라 관객들을 눈물 훔치게 한 이유와 비슷하다. 파묘의 이야기가 감동과 쾌감을 주는 이유는 책임감과 과감한 선택으로 삶을 바쳐 참사를 막아낸 자들의 서사기 때문이다.
악은 우리 민족 밖에 있다는 편리함, 각자 희생의 무게는 다르다는 모순
하지만 이 감동과 쾌감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 일본 귀신을 무찌르는 장면에서 상덕은 ‘불타는 칼의 상극은 물에 젖은 나무’라고 말한다. 과거 한반도를 건너 북진하겠다는 일본의 정신을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상념의 산물로서 무찌른다는 것이다. 물론 외부의 적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뭉치고 단합해야 할 것이다.
악은 외부에 있는 걸까. 영화는 악을 일본의 북벌 정신으로 규정하고, 그래서 관객은 편안하게 감상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 내부의 문제는 휘발된다. 외부의 적을 무찌르려면 내부의 문제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오컬트는 아니지만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와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사례처럼, 우리 내부의 이야기에 토속 신앙의 의례를 덧댄 영화들이 있다.
만약 ‘파묘’가 우리 내부의 이야기를 꺼내었다면 어땠을까. 생소함과 신비함을 동시에 낼 수 있었고, 영화가 끝나고 몰랐던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알게 된다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내부의 이야기라 불편함이 있었겠지만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우리 내부에도 말해지지 않고 영화로도 표현되지 않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다.
쾌감을 방해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주인공들의 성공에 가려져 더 이상 말해지지 않는 희생된 존재들이다. 선악을 이분법으로 나눈 이야기에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점이기도 하다. 특히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반복되는 딜레마다. 블록버스터니까 큰 규모의 파괴를 보여줘야 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적을 무찌르다 보니 다른 누군가가 희생되는 상황 말이다.
모순적으로 영화는 이 점을 인지하면서도 그대로 따라간다. 친일파의 자손이 원죄 때문에 죽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보국사를 지키던 보살과 축사에서 일하던 이주노동자의 죽음은 뉴스 한 줄로 언급될 뿐이다. 그러면서 축사를 난장판으로 만든 원인이 반달가슴곰으로 지목된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뉴스를 보는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곰을 사살해야 하는 여론이 갈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어떤 죽음은 당연시하면서 어떤 죽음은 무게가 무겁다.
흙에는 주인이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와 영토, 국경 모두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우리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도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너무나도 큰 개념일 수 있다. 설명되건 설명되지 않건, 자연 안에 있을 뿐이다. 오컬트 영화도 이렇게 훈훈하게, 삶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끝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으로 영화관을 나왔다. 곱씹다 보니 그 자리에는 민족주의에 기반한 이상한 감동과 쾌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