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번호(囚人番號) 1004'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by 코끼리 작가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한 날씨였다.

미옥이는 아침부터 아버지를 만날 생각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이번 달에는 혼자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재결합하겠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고,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탓에 다소 서먹서먹하고 어색한 엄마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신이 해결사 역할을 자청, 아버지를 만날 작정이었다. ‘아빠 어디세요?’ 김태식의 딸인 미옥이의 전화였다.

‘응, 아빠, 일하고 있는데….’‘아빠, 별일 없으시죠?’‘응, 근데, 네가 전화도 다하고 무슨 일 있어?’‘아빠! 딸내미가 아빠 보고 싶어 전화를 하는데, 무슨 일 있어야지만 전화를 하나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네가 갑자기 전화를 하니, 무슨 일 있나 걱정이 되어서 물어봤어. ‘김태식은 딸 미옥이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으나, 아무 일 없이 안부전화였다 하니 안심이 되었다.

‘아빠, 다음 주 토요일 시간 되면 제가 아빠 한번 보러 집에 가려고요.’

‘그날 특별한 일 없으시죠?’‘다음 주 토요일?’‘응, 그날 특별한 일은 없어.

그리고 특별한 일 있다 해도 우리 딸내미가 온다는데, 내가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있더라도 집에 있어야지. 하하….’

미옥이는 모처럼 꽃단장을 하고 외출을 하기 위해 대문을 여는데, 있으나 마나 한 대문이 삐걱대며 그의 불안한 외출을 알렸다. 대문을 나서자 하늘이 흐리게 변하더니 비가 세차게 내렸다. 우산을 받치고 있었지만, 비는 계속 미옥이의 어깨와 등을 두드리며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옷이 젖고 몸에 물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길에 나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 때는 오히려 빗줄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이미 흠뻑 적신 빗줄기는 땀 흘린 후에 하는 세수처럼 시원했다.

미옥이는 아버지가 있는 의성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가 오는 차창 밖은 운치가 있어 보였다. 늘 보는 차창밖 풍경이지만, 매번 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미옥이는 화장품 손가방에서 핸드크림을 꺼내어 비를 맞아 지워진 손 등을 문질렀다. 엄마와의 이혼 후에도 태식이는 미옥이를 끔찍이 예뻐하였다. 미옥이의 생일이나 기념일 에는 용돈을 주던, 선물을 사주든 꼭 잊지 않는 자상한 아빠였다.

그럴 때마다, 미옥이는 아빠가 예전처럼 집에 계셔 엄마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렸으면 하는 희망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사이, 시외버스는 어두운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길에는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쏟아져 나온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엷은 운무처럼 뿌연 빗속에서 달리던 차들이 가다가 서다가를 반복하면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소장님, 제가 오늘 집에 일이 있어 2시간만 일찍 퇴근하겠습니다.’‘김 선생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복장이 평소 때 하고 다른데?’‘예... 오늘 제 딸이 저를 보러 대구에서 온다 합니다.’‘조금 일찍 집에 가서 집 청소도 하고, 이것저것 준비도 좀 해야 해서요.’ ‘아! 딸내미가 오는군요?’‘그래요. 딸내미가 온다는데, 일이 무슨 소용이에요.

여기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일찍 들어가세요.’ 김태식은 공사장 소장의 배려로 평소보다 2시간 먼저 현장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염매시장을 들러 딸이 좋아하는 닭볶음탕을 할 생닭 하고 양념, 채소 등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딸 미옥이가 와 있었다.‘아니 미리 연락이라도 했으면 내가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마중은 무슨….’‘다 큰 숙녀가 길 못 찾을까 봐요?’

미옥이는 잠시 중학교에 입학하던 때를 떠 올렸다. 그날 많은 부모들이 입학식에 참석했지만, 자신은 엄마와 단둘이 있었다. 아버지는 미옥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엄마와 이혼을 했다. 어린 소녀에겐 큰마음의 상처였다. 중학교 때부터 미옥은 사춘기 소녀의 냉소적인 반항심으로 부모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스스로‘자학(自虐)’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직업을 적으라는 학교 통신 문란에‘원수(怨讐)’라고 적기도 했다. 미옥이는 그토록 멀리, 그토록 일찍 자신을 떠나가 버린 아빠가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그 시간 이후 변해버린 아버지는 더없이 초라해 보이는 ‘촌로(村老)’였다. 축 늘어진 어깨며, 남루한 옷차림이 더 이상 최고 존엄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지난 몇 년간 아버지가 살았던 삶과 아버지가 좋아했던 취미, 장점,

그 모든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지갑 속에 감춰두었던 가족사진을 보고, 자신과 닮은 아버지 얼굴의 특징들을 알아보면서, 옛날 아버지와의 다정스러웠던 시간으로 돌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미옥이의 손에는 아빠 김태식이 좋아하는 삼겹살이며, 과일 등을 담은 장바구니가 쥐어져 있었다. ‘뭘 이런 걸 사 오나. 그냥 오면 되는데….’‘어서, 들어가자, 내가 네가 좋아하는 닭볶음탕 맛있게 해 줄게.’ 김태식은 딸 미옥이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온 미옥이는 혼자 사는 아빠의 방이 너무 지저 분하자, 방청소를 하기 시작했고, 생각해보면, 부모가 자식인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다. 어려운 형편에 경제적인 지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가 그리 능력 있는 분도 아니었고…. 그러나 어릴 적 먹는 것만큼은 아빠는 풍족하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문제는 상상을 초월한 미옥이의 까다로운 입맛이었다. 김치를 싫어하는 것은 기본이고, 채소는 상추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찌개는 국물만 떠먹고, 한참 맛있게 잘 먹던 국에서 대파 쪼가리라도 나오는 날이면 숟가락을 놓았다. 돈 없어서 못 사 먹는다는 최고급 쇠고기도 미옥이 입에만 들어가면 질긴 생고무로 둔갑되었다.

음식 중 잡채를 끔찍하게 좋아하는데, 잡채에 넣은 돼지고기는 또 발라서 먹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입맛이니 밥상을 책임진 아버지에겐 식탁을 차리는 일이 그야말로 고군분투였다. 김태식은 미옥이가 사 온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고, 닭볶음탕도 같이 만들기 시작했다. 가스레인지에 구운 노릿노릿한 삼겹살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고, 이어서 갖은양념을 넣은 닭볶음탕의 냄새까지 온 방안을 진동시켰다.

‘자, 밥 먹자. 아빠! 혼자 살면서 음식 솜씨 많이 늘었는데, 어디 한번 먹고 미옥이가 평가 좀 해줘 봐라. 호호’‘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음식 하기를 좋아하셔서 그 솜씨는 익히 잘 알고 있어요. 물론 맛도 좋았고요. 뭐, 먹어보나 마나지요…. 푸하핫’

미옥이는 오늘만큼은 아빠가 차려준 음식은 가리지 않고 다 먹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어주었다.‘정말 맛있었는지, 아니면 맛있는 척 한 건지….’ 그건 모르겠지만, 아빠가 만들어놓은 음식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주는 기특? 한 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태식이는 삼겹살 한 점을 상추에 싸서는 입에 넣었다. 그리고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미옥이도 모처럼 만난 아빠와의 조촐한 저녁시간이라 아버지가 따라주는 소주를 잔에 담아 홀짝홀짝 들이마셨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닭볶음탕 한 그릇을 홀딱 비웠다.

‘역시, 아빠가 만든 닭볶음탕은 별미 중의 별미예요.’‘제가 이 맛에 아빠를 보러 오는 거죠….’‘아빠표 닭볶음탕은 언제 먹어도 맛있단 말이야. 호호’‘그래? 우리 딸이 그렇게 멋지게 평가해주니 고맙군. 거기다가 맛있게 먹어주니 더욱 감사하고….’

미옥이와 김태식은 모처럼 만나, 부녀지간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빠! 기억해?’‘내가 중학교 들어가던 때?, 아빠가 나를 데리고 중학교 들어간 기념으로 경주여행을 갔잖아?’‘그때, 일행들은 모두 가족 아니면, 친구들이랑 왔는데, 우리는 부녀지간으로 와서, 여행 일 행객들의 관심의 대상이잖아?’‘그랬지?….’ ‘심지어는 같이 함께한 여행객들이 아빠를 이혼남으로 생각했다고 말했잖아? 하하….’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가 나를 데리고 단둘이 여행 갈 생각을 했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 다들 그렇게 이야기했듯이 부자지간 또는 모녀지간끼리 여행은 많이들 가지만, 부녀지간끼리 오는 여행객들은 거의 드물다고 하셨잖아요?’‘어떻게 보면, 아빠가 나를 위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여행을 가 준 것이잖아?’‘어른이 되어서 생각해봐도, 아빠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미옥이는 소주를 곁들인 탓에 붉그스럼한 얼굴로 아빠를 바라보며 옛날의 추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래. 아빠는 재산이 많거나, 특별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빠 나름 데로의 개똥철학이 있어.’‘아빠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은 재산이 아니라, 꿈이라고 생각해. 다시 말해, 좋은 추억을 남겨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아빠는 언젠가 죽겠지만, 사는 동안 자식들과 소중한 시간을 가지고, 의미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해.’‘미옥이와 같이 여행을 다닌 것도 그런 이유이기도 하고…. 나중, 아빠가 죽고 난 후에 미옥이가 다시 아들이나 딸과 여행을 다니게 되면, 아빠와 함께 했던 추억을 되살릴 것 아니야? 그게 바로 아빠가 미옥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소중한 재산이야.’

김태식은 어릴 적 미옥이와 같이 갔던 여행에 대하여 추억을 복기하며, 이야기를 하였다. ‘아빠!...’‘...’ 미옥이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의미심장한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잠시 숟가락을 놓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빠, 사실 오늘 아빠를 보러 온 이유가 있어요.’‘그게 뭔데?’‘아빠하고 엄마하고 성격차이로 이혼한 지 벌써 15년이 다되어 가잖아요?’ ‘그런데?...’‘내가 어릴 적 아빠하고 엄마가 이혼을 한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어린 나이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어요.’‘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가 어쨌든, 이제는 결합을 하시는 게 좋다는 생각이에요.’‘엄마도 이젠, 아빠에 대하여 호의적인 생각이시고요. 이제 느지막이 재결합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아요.’‘아빠 생각은 어떠 세요?’ ‘미옥아. 그건 조금 더 고민해보자, 사실 이혼을 결심할 때도 그랬고, 이혼을 한 이후에도 이 결정을 받아들이기까지 꽤나 긴 시간을 고민하며 보냈다.

그런 시간이 15년이 지난 이때에 다시 결합을 한다는 것은…. 글쎄, 조금 생각해 봐야겠구나.’ 김태식은 딸 미옥이가 엄마와의 재결합을 종용하자, 많은 생각에 잠긴 듯 담배 한대를 꺼내 물었다. 담뱃불을 붙인 후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소주잔에 든 소주를 단박에 비웠다. ‘아빠, 그래서 말인데요. 오랫동안 아빠, 엄마가 떨어져 살았으니, 다음 달에 대구로 아빠가 들어오세요. 엄마하고도 상의했고, 엄마도 그렇게 하기를 희망하고 있어요.’‘일단, 들어와서 같이 살다 보면, 다시 엄마와의 좋은 부부의 연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렇게 되도록 힘써 도와드릴게요.’ 미옥이는 아빠가 재결합을 한다는 것에 다소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를 보이자, 아빠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와의 재결합을 강요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미옥이는 30살이 다 되어 혼기가 차있는 상태에서 주위의 시선도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이혼을 하여 따로 살고 있는 아빠, 엄마가 재결합했으면 하는 마음이 누구보다도 간절했다. ‘일단 한번 고민해볼게.’ ‘엄마의 의사도 중요하니까….’ 미옥이의 갑작스러운 제의에 선뜻 답을 내놓기가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결혼 후 미옥이를 낳기 전까지는 결혼생활이 순탄했고, 그 흔한 부부싸움도 없이 알코올 달콩 잘 살아왔는데, 미옥이를 낳고부터는 산후우울증이 심해, 부인과의 잦은 말다툼과 싸움으로 급기야 그 위기의 과정을 극복 못하고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조금만 참고 견뎠으면 하는 후회를 한 적이 많았던 태식이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재결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빠!’ 무조건 다음 달에는 대구 집으로 오셔야 해요. 약속할 거죠!?’ ‘그래, 일단 알았으니 오늘은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김태식은 딸 미옥이의 제안에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내심으로는 자신도 다음 달 이 집에서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후 마땅히 갈 집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태식은 오래간만에 미옥이와의 만남으로 과음을 하였다. 미옥이는 식사가 끝난 후 먹었던 식기류 등을 설거지하였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던 김태식은 미옥이가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여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를 마친 미옥이는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는 갈 채비를 하였다. 문 앞까지 배웅 나온 김태식을 향해,‘아빠, 내가 이야기 한 약속 꼭 지키셔야 해요!’‘다음 달에는 반드시 대구 집으로 오셔서, 식사도 같이 하고 엄마하고 나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응?’‘그럼, 그때 봐! 기다리고 있을게!’ 미옥이는 대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가족애 (家族愛)’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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