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미 선생님(이하 존칭 생략)의 새로운 책이 나왔습니다. 저자의 강의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김현미의 강의는 무척 재밌습니다. 뼈때리는 농담에 특유의 표정연기와 성대묘사가 곁들어져 강연 내내 웃고 나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네요. 새 책의 제목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을 듣자마자 한참 웃었는데,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감각이 빛나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에 대한 농담적 비판이랄까요.
표지 1.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당신에게 아무 것도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벨 훅스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을 이렇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의 수만큼 다양한 페미니즘이 존재할 수있다는 개념을 낳았다. 별안간 페미니즘에서 정치성이 서서히 옅어졌다. 그러나 정치성향이 보수건 진보건 여성이라면 페미니즘을 평소 라이프스타일에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분명 이런 식의 사고 덕분에 페미니즘은 좀더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는데, 여성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문화에 도전해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는 전제가 그 기저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33쪽)
이렇듯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당신은 얼마든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말했고,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마켓 페미니즘("여성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이나 시장과 결합하는 것", 칸톨라와 스퀴어스, 김현미 187쪽 재인용)과 찰떡궁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 성차별주의를 종식하기 위한 실천들의 갈래가 한가지는 아닙니다.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자칫 단 하나의 올바른 페미니즘이 있다는 식의 교조주의로 흐를 우려도 있었습니다.
2.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이 책에서 김현미는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교조적으로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힙니다. 재밌지만 가볍지 않은, 날카롭지만 따뜻한 접근이죠. 성공주의가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고통에만 주목하며 약자를 경쟁하게 만드는 구조적 불평등의 장에서 트랜스젠더와 난민를 배제함으로써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보다 해방을 향한 실천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자유란 "세계를 건설하는 실천"으로서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김현미는 "여성의 선택지들이 의미있는 중요한 사회변화의 가치를 지향하고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태동할 것"(김현미,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13쪽)이라면서 "라이프스타일을 사회운동의 개념으로 회복하자"(265쪽)고 제안합니다.
"만약 정치적 페미니즘이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만이 페미니즘 세계의 언어를 지배하고 있엇다면, 페미니스트가 거의 늘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는 전사처럼 각 잡고 "여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너무 '후진' 거예요(웃음).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 같은 소비와 페미니즘의 언어의 결합은 페미니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합니다. 팬덤과 마친가지로 여성들이 현재 고질적인 성차별로부터 받는 자기 모욕의 내면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죠. 하지만 이것은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통합적 라이프스타일로서의 페미니즘 인식론'과는 다릅니다. 통합적 라이프스타일이라면 '소비'에 주목하는게 아니라 삶의 태도, 가치, 지향점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 구조를 파악하고, 공동체적 연대를 이뤄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지향합니다."(같은책, 84~85쪽)
3.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바꾸는 사회운동
김현미가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사회운동의 예 중 하나는 비거니즘, 생태운동, 페미니즘 등입니다. 누구보다 오랜시간 노동연구를 해온 학자라는 점을 환기해보면, 당연히 여기에서 라이프스타일은 소비중심이 아니라 생산 중심, 삶 중심적 삶의 제반 형식을 말할 겁니다. 다수가 소비자본주의사회에서 공동체성을 소비행위로서만 혹은 팬덤으로서만 감각하는 상황에서 소수가 시도하는 다른 라이프스타일은 변화를 만들어줄 수 있는 중요한 사회운동적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주류가 용인하는 하나의 다양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다양화'하는 것에서 방향을 찾아내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친밀성의 성경제에 노정된 착취와 폭력, 그리고 문화적 습들을 바꾸자는 요구 등이 이어집니다. 또한 냉소, 무시, 조롱이 아니라 대화가 가능한 사회적 장을 마련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페미니즘은 라이프스타일 전반을 바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상의 혁명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부장 없는 미지의 세계는 유사친족관계를 만들어내는 여성들간의 협력적 자아로부터 그 태동이 시작될 수도 있고, 다른 방법이 시도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한가지만은 분명합니다. 페미니즘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는 것. 갑자기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의 슬로건이 떠오르네요. "나를 바꾼 여성주의, 세상을 바꾸는 네트워크"였지요.
4. 권력지형을 바꾸기 위한 후속의 제안들
강연록이니만큼 입말이 살아있어 기독성이 아주 좋습니다. 매 강연 때마다 나온 적절한 질문들이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하네요. 리이프스타일 전반을 바꾼다는 건, 어쩌면 새로운 상식을 만든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하겠죠. 권력지형을 바꾸기 위한 제안들을 종합하고 검토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차에,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 다음 스텝을 생각해볼 수 있는 독서였네요.
* 다음에는 낸시 프레이저의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만들 수 있는 좌파 포퓰리즘 기획을 얘기하고 있는데요. 문제의식은 동일하지만 전략에 대한 구상은 좀 다릅니다. 낸시 프레이저는 각잡고 얘기하는 정통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에 가까우니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