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vs 자연지능

약속된 언어 vs 추상적인 흔적

by 생기담은 철학


재작년에 출간한 철학책 <일어나는 이야기 - 생성과 정보의 철학>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읽기 어렵고 왜 이런 책을 썼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이라서,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했던 존재론의 핵심 아이디어를 좀더 쉽게 소개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다가 인공지능과 자연지능의 공통점과 차이점에서 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능은 궁금한 사항에 대해 이해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지능은 상황파악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하는 이해가 사람이 하는 이해와 비슷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현재의 인공지능이 상황파악하는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상황파악 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들과 어떤 관계 속에 있는 상황인지, 부분들이 이어지는 맥락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상황파악의 기초가 되는 부분들의 관계는 구체적인 관계가 아니라 추상적인 관계라는 점입니다. 내 앞을 지나가는 자전거와 나는 구체적인 관계가 물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중요한 상황은 사물들의 모양을 보고 자전거인지 알아보고 나와 충돌하지는 않을지 예상하는 것인데, 사물들의 모양은 사물들의 구체적인 결합 관계가 아니라 추상화된 연결 관계이고 충돌은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관계입니다. 즉 상황파악은 구체적인 사물들의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추상적인 연결 관계를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체적인 관계들은 파악할 겨를도 없이 형성되고 지나가 버리니까요.


인공지능의 발전은 수많은 데이터들에서 귀납적으로 특징적인 패턴을 추상할 수 있는 수학적인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방법을 통해서 컴퓨터는 지금 주어진 자전거 사진의 특징을 인식할때, 주어지지 않은 다른 수많은 자전거 사진들을 참조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일상 언어, 수학 언어, 컴퓨터 언어는 모두 추상적인 도구이고 이미 지능을 가진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구체물들만으로 구성되어 보이는 컴퓨터, 스마트폰, 전기의 흐름, 반도체의 회로 등은 항상 추상적인 언어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다루기 힘든 내용을 다루기 쉬운 구체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추상적인 약속이 필요합니다. 약속은 자연스럽게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인위적인 의지로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지능은 이렇게 발전된 언어를 기초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자연지능의 형성에도 언어적인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감각은 외부 세계를 감각 정보로 대체하여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자연지능은 감각 기관이나 뇌 같은 정밀한 하드웨어조차도 감각 없이 지능적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뇌의 신경전달의 연결된 흐름은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감각경험의 데이터들이나 뇌의 활동에 대한 데이터들은 메모리 반도체처럼 특정 구역에 정확한 언어로 저장되지 않습니다.

또 신경계가 없는 생물들도 원초적인 상황파악을 하며 살아갑니다. 미생물이 먹이의 농도를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화학 물질의 농도 변화라는 구체적 사건 속에서 '생존에 유리한 방향'이라는 추상적 정보를 읽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에서는 어떻게 지능 형성에 필요한 추상적인 연결들이 언어와 지능 없이 가능했을까요? 이에 대한 저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인 흔적들을 남긴다.” 책 제목인 <일어나는 이야기 - 생성과 정보의 철학>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이 흔적들의 감각경험적인 변형인 것이지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다.

이때의 흔적들이란 사건들의 내용은 그대로 남지만 구체적인 힘은 제거된, 그래서 추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흔적들입니다. 이런 의미를 담은 ‘말없는 이야기’라는 개념은 지능적이지도 언어적이지도 않은 사건 진행의 단편적인 데이터를 뜻합니다. 말없는 이야기들은 언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지나간 데이터들과 넓고 다양한 연결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일들의 내용과 일치하는 추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다시 구체적인 일들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 아이디어와 다른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기초로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는 유연한 이론을 구상하고 적용해본 것이 이 책을 통해 제가 시도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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