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근쥬스 Aug 09. 2023

T발, 너 C야?

처음에 이 문장을 보았을 때 '어? 이거 왜 비속어 표현에 안 걸리고 그대로 문장이 올라와 있지?' 싶었다. 문장 속 가득한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당연히 생생하게 전달되는 중이었고.


그런데 자세히 보니 문장 변형이다. '병, 형신이야?'와 같은 류의, 욕을 퍼붓고 싶지만 단어 필터에 걸릴 것에 대비해서 단어의 순서를 바꾼 틈새 공략 문장.


(한 물 간 것 같지만?) 최근까지 '너 T야?'라는 문장이 유행했다.

나는 T형 인간이니깐 '응, 나 T야.' 라고 대답하면 땡!

이건 일종의 밈이다.

MBTI에서 파생된 것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은 공감을 원했지만 팩트로 후려칠 때 던지는 말. (굳이 또 지겹게 MBTI냐 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너는 인성 x에 공감 불능이냐고 비꼬는 밈.

이런 밈은 적재적소에 어떻게들 이렇게 만들어내는 건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이지 언어 유희에 천재적인 사람들인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난 이 얘기를 꽤 많이 들었다.


1. 학교에서 학생들이 늘 '쌤 T에요?'라고 한다. 학생들이 자꾸!!! 책을 바닥에 떨어뜨리는데 내가 늘 '어머, 책 안찌그러졌니?!!'라고 하기 때문.


책이 모서리로 떨어지면 회복 불가능하게 찌그러지기 때문에 확인한건데 - 물론 학생 몸에 떨어지지 않았는지를 당연히 먼저 확인하고 -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보다 본인들의 안위를 쌤이 먼저 묻지 않은 것이 항상 서운한가보다. (조심 좀 하자 얘들아. 아...이거도 정서 학대면 안되는데...)


2. 친한 샘이 다른 샘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나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내 딴에는 진심으로 위로를 하려고 "그 쌤의 의도는 그게 아니고 이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걸거에요.넘 속상해하지 마세요." 라고 얘기했는데 "쌤 지금 그 선생님이랑 친하다고 그 분 편 드는거에요?!!!! 아 맞다. 쌤 T죠?"


예? 그게 T랑 무슨 상관인거죠..?


3. 특히나 이 문장은 남편이 쉴 새 없이 외치고 있을 문장이다. 엔프제 남편과 잇팁 와이프 조합이라 늘 상처받는 것은 그였으니.

하지만 남편도 B형 남자의 타이틀에 걸맞게 사람을 환장하게 한 적 많으니 나는 쌤쌤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한들 어디가서 한 성깔, 한 말싸움, 한 논리 한다는 남편이 유일하게 못 견뎌하는 것이 나였다.


얼마 전 쇼핑몰 식당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점심시간이라 어느 곳에나 사람이 바글바글 했기에 식당 한 곳 대기판에 이름을 쓰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종업원이 실수로 우리 뒷 팀을 부르고 우리 이름을 지워버린 상황이 벌어진 .


남편은 우리가 먼저 왔는데 왜 뒷사람부터 자리를 주냐고 사장님한테 클레임을 했다. 물론 나도 배고프면 금수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엄청 화가 났고. 하지만 나는 대문자 I라 속으로 씩씩거릴뿐. 


그런데 남편이 빨리 자리 안주면 다른 식당에 갈거라고 하는것이 아닌가! 아니 이건 아니지.  


 다급히 '아까 못봤어? 다른 데 가도 이거보다 훨씬 더 기다려야 돼. 단지 화난 감정 때문에 우리는 계속 배고픈채로 시간적 손해를 보고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좋은일을 시켜??'


남편 표정은 딱 이거였다.

'T발.. 너 C야????!!!'


그치만 내 말이 틀린건 아니었으니 씩씩거리면서 기다리는 남편이 귀엽고 짠해서 난 이미 화가 풀렸다.

그래서 '여기서 더 맛있게 먹자. 나도 화 엄청 나!' 라고 했지만 이미 틀렸겠지. ㅋ


반대로 한블리를 보면서 해군 중사에게 폭행당해 주저앉아 엉엉 우시던 기사님을 보고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이건 진짜 너무 화나는 사건이다. 사건도 괘씸한데! 술먹고 저렇게 택시기사님 폭행한건 가중처벌!) 같이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이렇게까지 울 상황이야....? 라며 어리둥절해 했다.


그..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걸...? 그냥 갑자기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났어. 나 원래 감수성 풍부해..... T는 감수성 있으면 안되는거야??




평소에 남편은 공감 받기를 원하지만 내가 종종 '아니 근데, 그건 그렇지않던?' 라고 반응하면 이제는 그냥 한숨을 쉬고 넘어간다.


처음엔 나도 보통의 남, 녀 관계에서 여자들이 공감받기를 원하는데 남자들이 들어주지도 않고 해결책을 내놓아서 싸운다고 들었기에 내가 해결책을 내면 서로 대화가 되어서 남편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당황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나도 부부의 관계를 위해서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아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속상했겠구나 싶은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공감해주고 있는데 남편의 피드백은 '성의없게 얘기하지마' 이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건데 표현이 뭐가 부족했는지 항상 어리둥절할 따름.


물론 남편이 T 처럼 굴 때도 많다. 나도 F일 때도 많다.

내가 디즈니를 보면서 울고 있으면 '쟤 대체 왜 저러는거야......' 라고 하고(엘리멘탈 엉엉엉), 내가 남편한테 '그냥 내가 마음이 이러니깐 들어달라고!!!' 라고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다만 비율적으로 내가 팩트를 들이미는 경우가 더 많아서 '너 T야?'라는 말을 더 듣는 것일 듯.


하지만 다짜고짜 그닥 관계가 가깝지 않은 사람이 나보고 T냐고 하면 은근 기분이 상할 것 같다. 꽤 긴 시간을 함께 지낸 사람들이 너 T야? 를 외쳐서 기분이 안 나쁜 것일테니. 그게 아니라면  나도 모르게 '나 T 맞긴 한데.... 근데 뭐? 그게 왜? 뭐가 문제야?' 이런 반응이 나올 것 같다.


상대가 '큐티, 프리티, 파티, 짜빠게티'라고 대답해 줄 정도로 친하지 않다면 '너 T야?'는 조심히 사용하는 것이 이 선인장이나 살아남을 날씨를 조용히 넘길 팁 아닐까.



8개월 가까이 브런치에 글을 썼습니다. 마지막 글이 작년 12월이라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쓰려고 했는데 계속 계속 그냥 생각만 하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갈줄은 몰랐습니다. 뭘쓰지? 계속 생각만 하고 아무것도 안 쓴 채로 시간이 휙휙 지나갔네요.


그래서 뭐라도 써보자 마음먹고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써져서 멍하니 몇시간을 모니터를보고 있었습니다. 역시 글도 계속 써야 써지는 것인가봐요.... 김동식 작가님을 몇년째 뵙고 있는데 꾸준히 쓰라고 매번 얘기하심에도 불구하고 네. 하고 안썼습니다. 반성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심폐소생술과 PTS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