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00여고 시험실 감독관으로 출장 나갔던 나는 시험 종료 후 집에 와서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있다가 -> 추워서 입은 옷 채로 침대에 들어갔다가(남편이 뚜껑 열리든가 말든가 모르겠고...) -> 새벽에 간신히 일어나서 화장을 지우고 씻고 다시 죽은듯이 자다가 -> 이제 정신 차리고 컴퓨터 켬......
나는 교직에 늦게 입문한 터라 수능 감독이 올해 처음이었다. (재작년은 1년차라 감독 x, 작년엔 예비였다가 차출되지 않았다)
옆 부 부장샘이 나에게 "누가봐도 고년차인데 수능 감독이 첨이라고??!!" 라며 놀라셨다. "그거 생년월일 적힌 명단만 넘어가서 쌤 무조건 정감독 배정할텐데?" 라고 걱정도 해주시고...
이번주에 감독관 명단이 학교로 넘어오고, 다행히 많이 멀지 않은 학교로 배정이 났지만 마음 한구석은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도 민원이 많고 소송이 많은 시험이라 아예 감독관들에게 배상 책임보험도 들어주는 그 유명한 시험이 대학수학능력시험 아니던가.
고등학교는 수시로 모의고사 감독이 있기 때문에 약간의 연습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실전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글고 나는 4교시 모고 감독을 한 적이 없었다...) 매번 감독 나가는 선생님들도 1년에 한 번 하는 거라 헷갈린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냥 가기 싫다고!!!! 라고 하심. ㅎㅎ 너무 힘들다고...
문제는 고등학교 교사는 99% 정감독(제 1감독관) 이라는 것이다. 중학교 샘들이 부감독(제 2,3 감독관)이다.
답안지에 날인하는 것도 내 도장이고, 고사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니 부담이 너무너무 클 수 밖에.
"나 저년차니까 부감 주지 않을까요?" 그랬더니 옆에 쌤 왈 "여기 또 헛된 꿈을 꾸시는 분이 계시네ㅋ. 쌤 134 아니면 234 정감이에요. 부감 꿈도 꾸지 말라고!!! 5교시 감독 안 주는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될 듯 " 라고 하셨다 ㅋㅋㅋ 5교시는 나이 어린 순으로 차출이다.
수능 감독이 워낙 힘들고 불안해서 감독에서 빠지고 싶어하는 샘들이 많다. 하지만 감독 제외 기준은 임신, 디스크 터짐, 중증 질환 정도다. 나는 과민성대장이 있는데 이건 기준이 아니라고. 걱정이 되어 혹시 시험 중에 감독관이 급똥 신호가 오면 화장실에 갈수있는지 확인해보니 복도 감독이랑 바꾸고 갈 수가 있다고 한다. 마음이 좀 놓인다.
감독관들 사이에 떠도는 말로 감독 난이도 4단계 썰이 있다. 남자 재수생 -> 남자 재학생 -> 여학생 문과 -> 여학생 이과 순으로 민감도가 올라간다고. 배정받은 학교는 거의 과탐 선택인걸 보니 민감도 최상 여학생 이과다. 이 학교로 오는 응시생이 무려 5백여명이다. 이러면 본부도 비상일 듯.
수능 전 날 학생들이 고사장을 미리 방문하듯 교사들도 해당 시험장으로 이동해서 감독관 교육을 받는다. 해당 학교에 가니 두툼한 감독관 유의사항과 시험장에 소지할 수 있는 안내문, 그리고 해당 학교 고사장 배치도 등을 주신다. 소중히 들고 와서 집에 와서 형광펜을 칠해가면서 계속 정독했다. 근데 아무 읽어도 4교시는 당최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다. 아니 왜 한 교시에 시험 3개를 한꺼번에 보는건데?????
밤새 고사장에서 문제가 생겨서 당황하는 꿈을 꾸다가 된통 잠을 설쳤다.
수능 당일, 감독관 교육은 7시반 시작이지만 7시쯤 학교에 도착해서 대기실로 간다. 어둑한 아침이지만 이미 도로에는 수능지원차량들이 지하철 역마다 깔려있고, 각종 버스들 앞 유리창에는 어느 고사장을 경유하는지 안내문이 붙어있다.
어제 안내받은 대로 수능은 대한민국을 일순간 정지시키는, 비행기도 못뜨고 출근 시간도 늦추며 주식 장도 늦게 열리는 어마어마한 시험이라는 것이 확 와닿는 순간이다. 내가 수능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떨린다. 수험생들도 속속 고사장에 도착하고 있다. 교문에 서 계시는 부모님들도 많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 괜히 짠하다. 오늘 하루종일 만신창이가 될 내 몸뚱아리도 짠하다.
핸드폰을 제출하고 준비된 샌드위치를 꾸역꾸역 먹으며 급히 진행되는 감독관 교육 리뷰를 들으면 1교시 감독관 배치문이 벽에 붙는다. 1교시부터 정감독이다. 이제 전쟁 시작이다. 시간을 엄수해야하니까. 오전 내내 강조한 멘트가 머릿속에 떠돈다. "선생님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이 나도 수능 시험은 진행되어야 합니다. 답안지는 목숨걸고 사수하세요."
본부로 뛰어가 물품과 시험지를 수령하고 고사장에 들어선다.
아이들도 비장하고 나도 비장하다.
부감은 컴싸와 샤프를 배부하고 전자 기기를 걷는 동안 나는 답지, 문제지 수량을 확인하고 수험생 신분대조 및 시계 확인을 해야한다. 혼이 빠지는 기분이다. 한 학생이 샤프가 안나온단다. 남은 것들 중에 심이 나오는지 확인하고 바꿔준다. 저쪽 학생도 샤프심이 안나온단다. 여분 샤프에서 샤프심이 나오는지 확인한다. 하 씨 진짜 이놈의 샤프 왜 안나오는데 ㅠㅠㅠㅠㅠ 식은땀이 난다.
신분 확인을 하는데 응시원서 사진과 신분증 사진이 미묘하게 다른것 같다. 재차 확인한다. 여학생들은 뽀샵이 많아서 완전 다른 사람이거나 성별이 바뀐게 아니면 넘어가라는데 그래도 다시 본다. '마스크 내려주세요.', '시계 보여주세요.' 본령이 울리고 정신없이 시험이 시작된다.
교탁 앞에 서서 둘러보는데 이마랑 등줄기에 식은땀이 계속 난다. 이제 답안지에 날인해야하니 부감을 불러서 세워두고 아이들 수험번호와 홀짝수 유형 등등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도장을 찍는다. 결시생이 2명이 있어서 결시생 답안지에 인적 사항을 적고 결시생 체크를 한다. 24장의 답안지에 날인을 하고 다시 교탁 앞에 선다. 식은땀이 계속 난다. 하지만 꼼짝할 수 없다. 감독관이 움직여서 시험에 방해되면 안되니까. 고사장 뒤편에 의자가 생긴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능장 민원 사례도 진짜 어마어마하다. 예시로 몇 가지 들어보자면 결시생 책상에 감독관이 걸터 앉아있었다. 감독관끼리 잡담을 했다. 감독관이 스쿼트를 했다. 감독관이 코를 풀었다. 감독관이 나만 쳐다봤다. 감독관 폰이 울렸다(이건 실제 소송걸림), 4교시에 감독관이 우왕좌왕해서 시간이 부족했다, 교육 똑바로 시켜서 보내라 등등등 -_-
이래서 구두도 신지마라, 신발에서 소리나는지 미리 신어보고 와라, 패딩 바스락 거리지마라, 현란한 무늬 옷 안된다(??!!!) 비염으로 코가 나오면 절대 풀지말고 그냥 흐르게 놔둬라 ㅋㅋㅋㅋㅋㅋㅋㅋ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한 수험생이 코를 곤다. 옆 학생이 그 학생을 흘끗 본다. 얼른 가서 깨운다. (이거 안깨우면 민원이다) 다시 잔다. 또 소리가 슬슬 나려한다. 다시 가서 깨우고 수신호로 코 골지 말라고 한다.
종료령이 울리면 정신없이 답지를 걷고 본부에 제출하고 대기실에 오니 다행히 2교시 감독은 없다. 2교시는 100분이라 정신력과의 싸움인데... 아 그럼 난 134 감독인가 보다.
서둘러서 점심을 먹고 (소화가 안되어서 대충 먹는다) 1시에 시작되는 3교시 영어 시험을 대비한다. 날씨가 이지경이라 천둥이 칠까 걱정이다. 듣기 평가때는 그 어떤 소리도 나면 안된다. 3교시에 신분 확인을 다시 해야해서 급히 신원 확인을 하고 듣기 평가가 끝나고 답안지 날인을 한다. 이 고사실에는 3명이 결시다. 결시자 답안지 인적사항을 작성한다. 교탁 앞에 서서 안내문에 4교시 내용을 읽는다. 아무리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될대로 되겠지!
4교시도 역시 정감독이다. 4교시는 시험이 많아서 부감독 2명이 들어온다. 본부에 미리 가서 시험지랑 물품들을 받고 5층을 향한다. (혹시 모를? 사고 예방으로 이 학교는 엘베를 꺼버렸다 ㅋㅋㅋㅋ) 고사실에 들어가려고 보니 물품백에 내 고사실이 아닌 옆 고사실 번호가 써있다. 딥빡이 온다. 하. 다시 내려가야 되잖아! 시험지 봉투 뭉텅이를 다시 들고 본부에 가서 다른 고사실껄 주시면 어쩌냐 썽을 내고 바꿔들고 다시 5층으로... 땀이 뻘뻘난다.
교실을 보니 빈자리가 엄청 많다. 칠판을 보니 결시생이 8명이다. 왓 더......-_-;;;; 일단 한국사 답지를 배부하고 부감님 1명을 교탁에 세워놓고 답지 날인하면서 8명 결시생 답안지도 작성한다 ㅠㅠㅠㅠ 뭐야 여기 결시생 왜케 많은데 ㅠㅠ 이따 탐구꺼도 결시생 답지 작성해야 되잖아 ㅠㅠ
30분 뒤 탐구 시험도 관건이다. 선택과목은 1시험지와 2시험지를 확인하고 1시험지만 올려놓고 나머지는 회송용 봉투를 줘서 거기다 넣어 바닥에 내려놓고 30분 셤보고 1시험지 걷고 2시험지만 올리고 다시 30분 셤보고 이후에 답지랑 시험지랑 회송용 봉투까지 다 걷고 수량 확인하고... 쓰면서도 뭔소린가 싶지만 여튼 깔끔하게 해냈다!!!!
그 와중에 학생이 수정 테잎을 달라는데 물품백에 없어...아 진짜.... 본부 물품백 확인 안하냐고!!! 복도 감독관님한테 수정테이프를 갖다달라 하고 기다리는데 또 다른 학생이 수정테이프 달라고.. 기다려요.... ㅠ
그렇게 진땀과 식은땀이 범벅이 된 채로 4교시가 끝났다. 본부에 시험지와 답안지 뭉텅이를 제출하고 대기실로 오니 영혼이 탈곡된 기분이다. 앞머리는 비오는날 + 땀 때문에 빙빙 말려서 엉망진창이다.
반가운 핸드폰 보따리가 와있길래 얼른 내 폰을 찾아 꺼내 전원을 켜니 드디어 세상과 연결된다. 남편의 힘내라는 7시반의 카톡을 5시 넘어서 봤다. 오늘 하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수능 감독은 당일에 (조촐한?)수당이 지급되는 구조였다. 오늘 하루를 갈아넣고 받은 돈봉투를 소중히 들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그대로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