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pont des arts (예술의 다리) 를 건너 센 강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여기는 문학과 지성의 거리 생 제르망 데 프레입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열띤 토론이 있었고 헤밍웨이와 카뮈의 아지트였다는 카페 드 플로르. 야외 테이블에 앉아봅니다. 눈앞으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갑니다. 이제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게 된 나는 조금은 어른에 다가선 모양입니다. 쓴 맛을 알아야 어른이 아니라 쓴 맛을 알면서도 모른척할 줄 알아야 어른이라는 것을 새로 배웠습니다.
우리는 카페 드 플로르에 완전히 자리 잡았었다. 아침 9시 부터 12시까지, 거기서 일을 한다. 점심을 먹으로 나갔다가 오후 2시에 다시 돌아와 친구들과 저녁 8시까지 수다를 떤다. 저녁을 먹고나서는 약속을 잡은 사람들을 만난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집처럼 항상 카페 플로르에 있었다.
- 장 폴 사르트르
파리의 카페나 주점에서 형성된 문학운동 서클에서 프랑스 상징주의가 탄생했습니다. 상징주의는 자유시와 순수시의 길을 열었고 영미이미지즘과 모더니즘의 씨앗을 발아했습니다. 기존 문단에 보편적이었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맞섰고 낭만주의의 한계를 이겨냈습니다.
상징주의를 개척한 파리 시인 보들레르는 선에 대한 강박에 대항하는 <악의 꽃>을 썼고 19세기 파리의 이면인 우울과 권태를 보여주는 <파리의 우울>을 썼습니다. 인간이 꼭 선할 수만은 없다는 현실적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아름답게만 그려지던 파리라는 도시의 이면을 파헤치고 실상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우울, 어두움, 병적인 것들, 영적 세계관, 퇴폐, 죽음, 영혼을 노래한 시들로 말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머리만으로 할 수 없는 경우도 잦습니다. 해서 18세기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인간중심 사상은 뒤집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단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술은 사실만을 그려내야 한다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상징주의 시인들은 가시적 세계와 불가시적 세계를 '상징'으로 매개하였습니다. 이는 물질과 심령의 조응을 뜻하기도 합니다. 불가시를 암시하던 모호함과 몽롱함은 '몽롱시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지만, 신비적, 영적, 퇴폐적, 주관적, 관념적, 형이상학적 성격의 상징주의 시에게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상징주의는 자유시의 씨앗으로 발아했습니다. 감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시각적 형식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운율로 노래했습니다.
상징파 시인들에 있어서는, 고정된 시형들은 시인을 구속하여 시형을 가득 채우기 위해 시인의 감정을 잡아 늘이게 하거나 위축케 하는 불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시형들의 상대적인 엄격성과 단순성은 복잡하고 변하기 쉬운 뉘앙스의 표현에는 별로 알맞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베를레느의 해방된 시(vers libéré, 즉 문장 구성법, 반구(半句)에서의 휴지(休止), 운 위의 강음 등에서 해방된 시)의 뒤에 자유시(vers libre)가 이어 왔다. 더 이상 규칙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단 하나의 규칙만이 있었다고나 할까.
즉, 시인의 내부 감동이 구두법과 휴지(休止)를 만들어 내고, 시구의 길이를 가감하며, 시구는 더 이상 운으로 끝나지조차도 않는다는 것이다. 시는 이제 조형(造形) 예술과 겨루려고 하지 않고, 음악과 겨루려고 노력한다. 즉 목적은 더 이상 외부 현실을 그 선명하고 조각적(彫刻的)인 모습 속에 그려 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금(心琴)을 줄줄이 울리기 위해 정확한 음악적 반주를 찾아 내는 것이다.
- 랑송불문학사
한국 현대시 역시 상징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시의 첫 발을 내딛었던 1920년대 한국낭만주의는 낭만성과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시인 김억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오뇌의 무도>를 번역하여 소개한 이후 상징주의가 흘러들어왔고 우리나라 시인들도 동인(同人)을 형성하여 동인을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의 생 제르망 데 프레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문학운동 서클처럼 말입니다.
예술이야말로 현실의 결핍 상태를 드러냄과 동시에 현실의 건너편을 가리키는 ‘평형(平衡)의 지혜’라고 예찬하기도 합니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누리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기존의 관습과 관성을 일상적으로 뛰어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성은 우리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추구해야 할 목적이나 예술이 수행하는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개인과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열어주는 해방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관용과 다양성은 그런 점에서 예술의 전제이며 예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깊이 있는 관련을 추구하는 것이며, 어떠한 미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수많은 ‘소통 방향’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더불어 숲> 중에서
이렇듯 파리는 타성에 젖지 않은 자유로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상징주의를 탄생시킬 수밖에요. 루브르 박물관 아래 센 강을 가로지르는 pont des arts (예술의 다리) 위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무엇이든지 내가 지금껏 해왔던 방법과는 다르게 무언가를 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