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한창 폭우가 쏟아지다가, 딱 하루 이상하리만치 비가 덜 왔던 날이었다. 날은 무척이나 습했다. 마치 가습기에 얼굴을 대고 있는 마냥 습한 날씨.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온도가 높진 않아 후덥지근하진 않았다. 이런 날씨에 축제를 즐기는 게 가능할까, 하는 의심이 앞섰지만 일단 축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축제장에 도착하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문화비축기지’라는 그 공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문화비축기지라는 공간을 인지하게 된 것도, 그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공간이 주는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듯 했다. 드넓은 공간에 마치 오래전 우주에서 불시착 했거나, 어느 전쟁에 방공호로 쓰였을 것처럼 생긴 건물 몇 개가 무성의하게 툭툭 놓인 공간. 추적추적 내린 비가 건물 외관들을 적셔, 더더욱 건물 자체가 세월에 녹이 슨 것처럼 보였다. 공간만으로도 역사고 예술이라, 이 공간과 ‘예술가들의 축제’가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을 받아든 후, 오늘의 계획을 짰다. 비가 온 탓에 꽤나 많은 공연이 축소되거나, 사라진 상태였다. 아쉬웠지만 축제를 계속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아무래도 각각이 공연이라, 축제 공간에 약 6-7시간 머무를 예정임에도 볼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다. 이동시간과 예약시간까지 고려하면 향유할 수 있는 공연은 최대 4개 정도.
팀 무앎무악의 갈매기와, 극단 갈피의 남겨진 것들, 북극귤의 몬몬 읽기, 우주여행당의 사사로운 유서낭독 프로젝트 이렇게 4개를 보기로 정하고 움직였다. 얼굴에 달라붙은 습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견디기 유쾌한 류도 아니라 공연이 제발 실내에서 이뤄지기를 빌었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대부분의 공연은 야외에서 진행됐다.
그런데, 또 ‘야외 공연’이 주는 특유의 바이브가 있었다. 보통 공연장에서 공연을 할 때, 나는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운 상태로 공연을 감상한다. 공연장 내부에 소품 하나, 소리 하나, 조명 하나 그 모든 것들이 계산된 공연에서 ‘필요 없는’ 정보란 없기 때문이다. 공연장에서 내게 들어오는 정보들을 최대한 받아들이기 위해 예민해지곤 했다.
하지만 야외 공연장에서 진행되는 공연은, 내가 누려왔던 공연과는 달랐다. 심지어 이 날은 비가 온데다가 맞은편 올림픽 극장에서 경기가 있었기에 더더욱 변수가 많았다. 공연 중간에 갑자기 배수관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나며 물이 콸콸 흘러간다거나, 맞은편 공연장에서 북을 둥둥치며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일이 즐비했다. 공연장 바깥을 지나다니는 다른 관객들의 잡담이 들리기도 했고, 심지어 공연장 한구석 벽에는 비를 피해서 들어온 듯한 커다란 주황색 거미가 매달려있었다.
통제되지 않은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야외공연장.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모든 변수들이 ‘공연의 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배수관의 물이 흘러가는 소리는 격동하는 인물들의 마음 상태를 대변하는 듯 했고, 벽에 붙은 주황색 거미는 오갈 곳 없는 인물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 했다. 결코 의도된 바가 아님을 명백하게 알고 있음에도, 그곳이 공연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것이 의도된 바처럼 느껴졌고 의도된 바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공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됐다. 보통 공연장 내에서는 통제되지 않은 정보(바깥 오토바이 소리나, 다른 사람들 잡담 소리 등)가 들어오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통제되지 않은 것들’이 주는 바이브를 즐기게 됐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다.
감상했던 4개의 공연 중에,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북극귤의 몬몬 읽기와 우주여행당의 사사로운 유서낭독 카페였다. 특히나 몬몬읽기는, ‘제대로’ 감상한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몬몬 읽기
극단 갈피의 공연을 본 후, 도저히 습함을 견디지 못해 카페에서 잠깐 쉬었다. 북극귤의 몬몬읽기를 보려고 했으나, 1인씩만 감상 가능한 극이며 당장 남는 티켓이 없다는 말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카페에서 몸을 식히는 중이었다.
그때, 우리가 앉은 좌석 오른쪽에서 갑자기. 한 여자가 달려 나와 한 남자 앞에 섰다. 설레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던 여자와 남자.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이게 현실인지 퍼포먼스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이내 남자는 카메라를 꺼내들었고, 여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포즈를 지었다. 카페 한 구석에는 헤드폰을 낀 사람이 앉아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또 다른 한 구석에는 핸드폰으로 이들의 모습을 찍는 이들이 있었다. 저 헤드폰을 낀 분이 스태프고, 다른 분들은 우리와 같이 이런 즉흥 퍼포먼스에 놀란 관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해서 해당 퍼포먼스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한 퍼포먼스가 끝나니 헤드폰을 낀 스태프는 박수를 쳤고, 구석에서 촬영을 하던 무리는 배우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약 10분 뒤, 스태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고 또 다시 퍼포먼스는 반복되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공간에서 해당 퍼포먼스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 초대받지 않은 이는 우리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이게 ‘1인씩만 감상 가능한’ 몬몬읽기의 정체라는 걸.
헤드폰을 낀, 스태프라고 생각했던 이는 커다란 앨범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고 배우들은 그에 맞춰 연기를 하고 있었다. 앨범 속 상황이 진짜 현실로 ‘팝업’되는 팝업북 공연이었던 거다. 초대받지 않은 관객인데, 나는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그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더불어 ‘초대받지 않은 관객’이 존재할 수 있는 이 공간에 감탄했다.
프린지 예술축제 동안 이 공간 자체가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내가 앉아있던 카페는 공연장이 아니었고, 공연에서 벗어나 일상을 얘기하는 곳이었지만. ‘예술 축제’라는 상황이 모든 공간을 예술가들에게 내어줬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이 곳 밖, 일반 카페에서 이런 퍼포먼스가 벌어진다는 것은 상상이 안 갔다. 예술가들에게 공간을 내어주니, 이런 연출이 가능하구나. 오히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기에 ‘몬몬 읽기’는 내게 더더욱 큰 감흥을 남겼다.
사사로운 유서낭독 카페
애초에 가장 기대했던 공연 중 하나였다. 각자의 유서를 읽어주고, 또 관객들의 유서를 받는 카페라니. 컨셉 자체가 무척이나 신선했다. 입장할 때 그 기대감은 더욱 증폭됐다. 정말 ‘카페’에 들어가는 마냥, 공연장 입구는 갖가지 ‘카페스러운’ 안내문들로 가득했다. ‘직원들의 마음 가짐’이나, ‘사사롭게’란 사훈 등 하나하나가 위트있어 공연 시작 전부터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공연장에 입장할 때, 모든 관객은 자신의 닉네임을 적은 이름표와 종이, 펜, 부조금 봉투를 받았다.
공연 또한 꽤나 위트있게 흘러갔다. 하나의 이야기가 자연스레 쭉 이어진다기 보다는, 각 인물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각 캐릭터의 매력과 그들이 말하는 ‘유서’를 이해하게 하는데 도움을 줬다. 약간의 실수나 어색함조차, 그들이 20대 초반의 화자였고 그에 맞는 어색함을 보여준 듯 해 자연스러웠다.
모든 인물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장례식에 대해서 말한 후 관객들에게도 ‘죽음’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이 주어졌다. 나 또한 꽤나 고민을 하며, 내게 주어진 하얀 백지를 채워나갔다. 각자에게 닉네임을 부여한 만큼, 또 유서 낭독 프로젝트인 만큼 이렇게 채운 유서를 랜덤으로 돌려서 다른 사람의 것을 읽게하거나, 배우들이 유서를 걷어서 랜덤으로 읽을 줄 알았다. 그런 방법만큼 다양한 이들의 유서를 읽게 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공연은 준비된 유서 약 3개를 낭독 한 후, 관객들에게 ‘더 공유하고 싶은 유서 없냐’고 물어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관객들은 원체 첫 번째 물음에 나서는 법이 잘 없는 한국인들이었고, 모두가 쭈뼛하고 있는 사이 공연이 마무리됐다. 공연 컨셉이 좋았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조금만 더 진행방식을 바꿨다면 이 컨셉을 더욱 잘 살리며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연장을 나섰다.
북극귤의 몬몬을 제외하고서는 내가 감상했던 3개의 공연이 모두 ‘아마추어극’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생계를 위해 공연을 하는 이들이 아니라, 단지 공연을 사랑하기에 생계의 틈에서 공연을 하는 이들. 그렇기에 그들은 분명 어설펐고, 공연엔 아쉬운 점이 꽤 많았다. 어떤 공연에선 배우들의 연기톤이 도저히 나와 맞지 않아 인터미션에 급하게 나와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각 공연의 그 새로운 시도들은 이들이 ‘아마추어’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생계를 위해서 공연을 하는 게 아니고, 금전을 추구하는 게 아니기에 나올 수 있는 그 수많은 시도들. 그 새로운 시도들을 보고, 단지 예술이 좋아서 움직이는 이들의 뜨거운 열정을 맛본 것만으로도 서울 프린지 축제는 충분히 의미 있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새로운 시도가 아름다웠던 축제. 열정이 식고, 연극을 팔짱끼고 무감하게 바라보게 될 어느 날 또 다시 이 축제를 즐기며 다시금 그 열정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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