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도 온전한 세계를 위해
“파티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고 웃고 있는데, 저 멀리서 서로 눈이 마주치고 뗼 수 없는 거예요. 섹슈얼한 이유가 아니라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서. 언젠가 끝날 인생이라 재밌고 슬프기도 하지만 거기엔 비밀스런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그게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거예요.”
영화는 가장 첫 시퀀스를 소피와 프란시스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장난으로 싸움을 하고, 창틀에 걸터앉아 대화를 나누고, 서로가 함께라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짖궂은 장난도 거리낌 없다. 그들에게는 다른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세계’가 있었다. 이후 프란시스가 친구네 가족과의 대화에서 말한 그 ‘세계’는 틀림없이 소피와의 세계를 지칭한 것이었을 터다. 다른 사람에게 소피를 소개할 때는 항상 ‘나와 쌍둥이 같은 친구’라며, 소피는 또 다른 자신과 같음을 강조한다. ‘프란시스의 세계’는 소피와 함께함으로써 완전했고, 그렇기에 소피는 또 다른 프란시스였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소피가 사라져버린다. 그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소피는 ‘더 나은 조건의 아파트’에서 살기위해 다른 친구와 함께 사는 길을 택한다. 남자친구와 함께 하기 위해 프란시스와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종래엔 일본으로 떠나기까지 한다.
그렇게 소피와의 세계에서 분리 당한 프란시스는 당황해 한다. 그리고 소피와 분리됐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소피와 다른 아파트에 살게됐음에도 프란시스는 여전히 ‘아호이 섹시’라는 둘만 아는 언어를 사용하고, 소피를 그리워하고, 항상 그녀의 자리를 비워둔다. 하지만 소피는 점점 멀어져갈 뿐이다. 소피가 멀어져감에 따라 프란시스의 세계는 부서져간다. 누군가와 함께해서 완전했던 세계는 누군가 떠나가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초반 프란시스는 그렇게 세계가 부서져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괜한 너스레를 떨며 자신은 괜찮고,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여전히 소피는 ‘쌍둥이 같은 친구’다. 하지만 프란시스도 내심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둘만의 세계는 이미 끝나버렸다는 것을. 프란시스가 제대로 둘만의 세계의 끝이 왔음을 느낀 건, 아이러니하게도 소피와 오랜만에 한 침대에 누워 잤을 때다. 남자친구와 싸우고 프란시스의 기숙사 방에 불쑥 찾아든 소피와 프란시스는 오랜만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나누던 대화였던 말을 힘겹게 꺼낸다. “I Love you”
파리에서도, 기숙사에서도 절절하게 뱉어지는 “I Love you”라는 대사는 아직 프란시스의 세계는 소피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표상이다. 하지만 소피는 그에 적절히 대답해주지 못한다. 다음날, 프란시스를 깨우지도 않고 자리를 정리하고 떠난 소피를 프란시스는 맨발로 쫓아나간다. 멀어져가는 소피의 차를 맨발로 쫓으며 소피를 부르다, 이내 망연히 소피를 바라보는 프란시스는 마침내 소피와 자신의 세계는 깨졌음을 인정한다.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프란시스는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모습이다. 돈벌이를 위한 직장을 가졌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꿈도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안정적인 것은 프란시스의 눈빛이다. 프란시스의 안무 발표날 찾아온 소피를 프란시스는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내 세계의 일부’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다. 한 때는 자신의 세계였던, 과거의 소중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 이런 프란시스의 태도의 변화는 ‘소피가 누구냐’고 묻는 교수의 말에 대한 프란시스의 대답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내내 ‘소피는 나와 쌍둥이 같은 애’라고 대답하길 주저하지 않던 프란시스는 처음으로 ‘가장 친한 친구’라고 대답한다. 마침내 ‘소피와 함께해서’ 완전했던 프란시스의 세계가 끝나고, 프란시스 혼자로도 완전한 세계가 시작된다.
영화는 시간순서대로 흘러간다. 그런데 영화에서 시간보다도 중요시 여기는 게 있다. 바로 공간이다. 영화 중간 중간 삽입된 간지는 ‘시간’이 아닌 ‘공간’을 조명한다. 반더빌트 거리, 캐서린가, 새크라멘토, 파리…각각의 공간에서 프란시스에게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변화는 없다. 정착한 곳이 없기에 프란시스는 이곳 저곳 흘러다닐 뿐이다.
영화 중반부 까지 맨 처음 소피와 같이 살던 아파트를 제외하고서는 프란시스의 의지로 머무른 공간도 없었다. 소피가 다른 집을 얻어 나갔기에, 월세를 낼 수 없기에, 소피가 여행을 간다고 하기에, 소피가 일본을 간다고 하기에…타인을 이유로 프란시스는 계속해서 옮겨다녔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공간을 흘러다님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도 프란시스의 공간은 없다. 그녀는 타인의 공간에 잠깐 머물다 갈 뿐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공간의 이동이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초반 소피와 함께 살 때는 단단하던 프란시스의 눈빛이 점점 공허해져간다.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던 당당한 눈빛은 점점 그 세계를 잃어간다. 자신만의 공간이 없는 이는 이 세계를 부유한다.
그렇기에 영화 마지막 시퀀스에 한 껏 줌이 된 ‘프란시스 하’라는 이름은 울림을 준다. 타인의 공간에 머물러 왔기에 단 한 번도 ‘스스로’의 공간을 갖지 못했던 프란시스는, 마침내 홀로 정착한다. 우편함에 써 넣은 프란시스의 이름은 그 공간이 다른 누구의 공간도 아닌 프란시스의 공간임을 알린다. 프란시스가 마침내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만약 영화가 더 진행되고, 프란시스가 이사를 가게 된다고 할지라도 영화에 장소 이동을 알리는 새로운 간지가 추가되지는 않을 것이다. 장소에 따라 흔들렸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그 어디를 가더라도 프란시스에겐 공고한 스스로의 세계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의 성장기를 보면서 대견한 마음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더 컸다. 프란시스에게서 내 모습이 겹쳐보였기 때문일까. 아직도 대학때 처럼 즐겁고, 우정과, 꿈을 쫓고 싶은데 녹록지 않은 현실에 좌절했던 수많은 나날들. 또, 주변 사람들을 너무 좋아해 그들과 스스로를 분리하지 못했던 수많은 나날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기위해 '현실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또 주변과 나를 동일시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좋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 그런거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그 당시의 내가 더 빛나보이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프란시스를 보면서도, 그녀가 성장할 수 밖에 없고 성장해야한다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그러지 않길 바랐다. 그녀는 멋있게 성장했고 훨씬 안정적인 눈빛을 가지게 됐지만 그게 어쩐지 슬프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도 얼른 성장해서, 보다 안정적인 눈빛을 가지고 싶지만 그 이후에도 프란시스의 성장을 보면서는 안타까운 마으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성장'은 이 세계와 현실이 요구하는 것일 뿐, 성장만이 최고의 가치가 아님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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