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희정 Mar 20. 2020

[Review]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당신이 알고있던 '여신'들은 틀렸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지금까지 내가 그리스 로마신화를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서사였는지를 일깨워주었다. 아니, 고대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그 같잖은 스테레오 타입과 합리화를 낱낱이 드러내 주었고, 나 또한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얼마나 거기에 동조해 왔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는 지금껏 내가 알고 있었고, 남성적 시각에 의해 다른 존재로 치부된 '여신'이 아니라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분투하는 '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가정을 지키는 헤라?

보통 가정의 여신으로 불리는 헤라. 그런 헤라가 제우스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기 전에는 무슨 신이었을까. 헤라는 천공의 신, 혹은 대지의 신이었다는 설이 있다. 최고신인 제우스에게 그렇게 반발할 수 있던 이유는 단순히 아내여서가 아니라 제우스와 같거나 대등한 힘을 가진 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헤라의 힘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헤라의 주요한 위치는 ‘제우스의 아내’로서 정립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결혼 전 그의 행적이나 힘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어떤 여성이라도 결혼을 하면 결국 남성 및 가정에 종속된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가정의 신이라는 역할에 부합하게,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신화 속 헤라의 주요 행적은 제우스의 바람에 대한 질투심으로 내연 관계에 있는 여성들을 처벌하고 다니는 것이다. 제우스의 바람과 헤라의 질투로 생겨난 에피소드만 해도 열손가락이 넘어갈 정도다. 여기서 포인트는, 헤라의 처벌 대상이다. 사실 결혼관계의 신의를 저버린 것은 제우스고 상대여성은 대부분 제우스에게 강간당한 것에 불과함에도 헤라의 분노는 상대 여성과 그 자식들에게 향한다. 사실 이 모든 서사의 가장 큰 악역은 제우스임에도 신화의 묘사에는 ‘어쩔 수 없는 바람기를 가진 제우스’와 그를 질투해 악독한 짓을 서슴지 않는 ‘매서운 질투의 화신 헤라’라는 시각이 묻어난다. 헤라와 제우스의 서사에서도 남성의 바람은 ‘남자는 원래 다 그렇다’며 눈 감아 주면서도, 그에 감히 ‘여성’이 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은 혀를 차는 남성연대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현대까지도 내려오는 ‘여자는 질투의 화신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고정관념의 발로이기도 하다. 제우스와 비등한 힘을 가진 신임에도 불구하고 헤라는 자주 단지 제우스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인간 여성과의 대립도 마다하지 않는, 가정과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극 중 헤라는 제우스만을 쫓는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인물로 나온다. 결혼 전 대지의 여신이었고, 제우스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을 만큼 매력적인 여신이었지만 결혼 이후 그녀가 하는 일은 제우스의 바람현장을 잡아내는 것뿐이다. 하지만 헤라가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전통적인 ‘가정’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 모든 사건에도 불구하고 헤라는 여전히 제우스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제우스를 직접적으로 벌하거나 이혼하지는 못한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않자 그의 사랑을 받는 이들을 증오하고 또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 자괴감을 느끼고.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생각에 또 다시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는 헤라 또한 제우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남성들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단지 남편의 그림자에 가려 ‘가정’이란 허상을 지키기 위해 이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정숙함을 지키며 제우스의 내연녀들을 벌하고 다녔던 신화 속 헤라, 즉 가부장제 사회 남성들의 시각에서 해석됐던 헤라의 모습은 극 속에서 ‘사랑’이란 자신의 욕망을 가진 여성으로 치환된다. 

 

 

아름다움이란 권력을 가진 아프로디테?

애초에 제우스가 분노에 차 아버지의 성기를 자르면서 나온 정액이 바다에 튀면서 생겨난 아르테미스가 ‘사랑의 여신’이라는 것도 고대 사람들이 정의한 사랑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고민케 만든다. 아름다운, 이라 표현하지만 결국 그 ‘아름다움’은 정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실제로 수세기 동안 여성의 아름다움은 남성의 정욕으로 평가받아왔다. 남성들은 여성의 미를 자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겨왔고, 여성들이 미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미와 같이 하찮고 남성들에게 잘 보이는 것에만 목을 맨다며 비웃었다.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인 트로이 전쟁의 시초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 누구냐’라는 질문을 두고 헤라와 아르테미스, 거기다 심지어 지혜와 전쟁의 여신인 아테네의 감정싸움이라는 점 또한 그러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아름다움에 끌리는 자신들의 감정은 한없이 당연하고, 거절당하는 것은 너무도 마음 아픈 일이라 그들은 아름다움에 권력을 부여한다. 아름다움은 권력이며, 그렇기에 아름다운 외모에 끌렸다가 거절당해 비통한 남성의 마음은 ‘권력자인 아름다운 여성’이 그 권력을 남용해 남성을 상처준 것이다. 아프로디테의 남편 헤파이토스가 아프로디테에게 선물한 허리띠가 ‘아무도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움에 끌리는 남성들의 마음은 불가항력이라는 변명이다. 


헤파이토스는 아프로디테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신들에게 버림받았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아프로디테를 ‘소유’하기 위해서 신들에게 그녀를 요구하고 결혼까지 한다. 정작 아프로디테를 아끼진 않지만 다른 남자와 불륜을 하는 것은 두고 보지 못한다. 때문에 헤파이토스는 아레스와의 불륜을 응징하기 위해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정사를 나눌 때 그물에 가둬버린다. 그리고 아폴론, 제우스, 포세이돈과 같은 남신들을 불러 그 장면을 구경케 한다. 왜 하필 ‘남신들’만 불렀는지 의도가 의심되는 것과 동시에, 헤파이토스의 행동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데이트 폭력에 가까우나 ‘정숙하지 못한 아내를 징벌하는 남편’의 프레임 안에서 헤파이토스는 동정 받을지 언정 비난받지 않는다. 아프로디테의 알몸을 지켜본 남신들의 반응은 이를 더 두드러지게 보여준다. 그 데이트 폭력의 현장을 보면서도 아폴론과 헤르메스는 ‘아르테미스와 잘 수 있다면 저렇게 평생 갇혀있고 싶다’며 농담을 주고받는다. 


극 중 아프로디테는 성관계와 아름다움의 그 ‘권력’을 누리면서도 한편으로 거기에 의문과 공허함을 느끼는 인물이다. 극의 초반 아프로디테는 남성들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행동한다. 끝없이 화장을 고치며 미에 집착하고, 남성들에게 성적대상화 되는 것을 즐긴다. 헤파이토스에 의해 아레스와 그물에 갇혔던 것 또한 웃으며 가볍게 넘기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남성 판타지에서 자주 묘사되는 ‘예쁘지만 멍청하고 성관계를 좋아하는, 한번 자거나 애인하기엔 좋지만 결혼 상대는 아닌 여성’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렇게 남성의 시각으로 해석되는 것을 즐기는 듯 보였던 아프로디테도 사실은 그 폭력성에 지쳐가고 있었다. 아프로디테는 남자가 많이 자고 다니면 능력 있다고 말하면서, 왜 여자가 그러면 헤프다고 말하냐 의문을 던진다. 사랑을 육욕으로 치환하더라도 남성의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지만, 여성의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다녔던 제우스가 상호 동의하에 관계를 맺어왔던 아프로디테보다 훨씬 비난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변 신들도 헤라도 제우스를 크게 모욕하진 않아왔다. 하지만 아프로디테는 ‘여성’임에도 뭇 남성들과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 때문에 그물에 갇혀 모욕당하거나, 주변 신들에게 헤프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고 여성이 헤프다는 꼬리표는, 그 이후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헤파이토스의 그물은 물론이고, 아프로디테는 사랑하는 아도니스가 전 애인인 아레스에게 살해당하는 일을 겪는다. 각자의 감정은 각자의 책임임이 분명함에도 아레스는 자신의 분노의 책임을, 나아가 살해의 책임을 아프로디테의 ‘헤픔’에서 찾는다. 한때 자신의 ‘소유물’이었던 그녀가 다른 남성과 관계를 맺는 것을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냐는 것이다. 폭력의 피해자임에도 가해자 논리에 의해 가해자가 되어야했던 아프로디테의 서사는 수많은 데이트 폭력과 가정폭력, 이별살인 등을 ‘맞을만 해서 맞았다’, ‘남자의 순애보를 망친 책임이다’라 말해왔던 사회의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남성을 휘두르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믿어지는 그녀는, 사실 남성권력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순결한' 처녀 아르테미스?

아르테미스는 본래 그리스로마신화에서도 가장 미묘한 지점을 가지는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처녀신 ‘아르테미스’였지만, 로마 신화에서는 다산의 신 ‘디아나’와 동일시된다. 결국 고대 사람들이 한 여신의 서사를 이해하는 데 처녀와 다산이라는 두 가지 잣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곧 고대부터 남성들이 여성의 섹스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시사한다. 추앙받는 여성의 ‘성’은, 처녀여서 뭇 남성들이 동경하게 만들거나 처녀가 아니라면 가슴을 잔뜩 달고 있을 만큼 ‘재생산’에 집중돼 찬사 받아 마땅해야했다. 


사냥의 신이면서 금남의 구역에 사는 처녀 신, 동시의 다산의 신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아르테미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미묘한 지점을 가진다. 실수로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보게 되어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는 운명을 맞이한 악타이온의 이야기가 정작 화가들에게는 가장 많이 그려진 모티브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남성 화가들은 악타이온의 시선을 빌어 ‘처녀’ 아르테미스의 아름다운 몸을 감상한다. 그러면서도 악타이온의 이야기로 ‘정숙한 처녀’의 정결을 더럽히면 벌을 받는다는 교훈을 주고자 한다. 이것만을 보더라도 아르테미스의 성이 고대 남성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극은 철저하게 남성 중심으로 해석돼왔던 아르테미스의 성을 아르테미스 본인, 즉 여성의 서사를 중심으로 재해석 해낸다. 아르테미스가 처녀를 고수하고자 하는 이유는 여성의 인생에선 사랑이 가장 중요하며, 사랑을 위해서는 뭐든지 바칠 수 있다는 스테레오타입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신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사랑은 그에 방해물일 뿐이라 생각한다. 아르테미스의 선택에는 처녀를 추앙하는 남성권력의 영향이나 여성은 순결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의 영향이 없다. 처녀 맹세는 오히려 남성들의 성애의 대상에서 벗어나 동등한 존재로 평가받기 위한 방책이며, 미혼의 여성은 성관계를 맺으면 안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사랑하지 않는 이와 관계를 맺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악타이온을 벌한 이유는 감히 아르테미스의 순결함이 모욕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적 대상화되지 않고자 그렇게 노력해왔던 아르테미스의 몸을 훔쳐보고 칭찬이라는 명목으로 감히 성적 대상으로 평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르테미스에게도 사랑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 아르테미스가 경멸하는 것은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되는 것’, ‘사랑 때문에 커리어를 망치는 것’이지 사랑 그 자체가 아님에도 아르테미스는 사랑을 기피한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오리온을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인정  욕구를 이용한 아폴론의 간계로 잃게 되고 마는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자주 커리어와 사랑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하나만을 선택해야하는 처지에 놓인 여성들의 모습을 은유한다. 아폴론의 간계만 없었어도 사냥의 신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사랑도 할 수 있었을 아르테미스처럼, 사랑과 능력에 대한 인정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성중심 사회에선 여성의 사랑과 능력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나 여성의 서사를 말해놓고, 결국 세 여성이 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점에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아르테미스가 경계했던 것 처럼 모든 여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애정사라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냐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 남성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 혹은 모든 신, 혹은 우리가 '인격'이라 부르는 것을 가진 모든 이들은 결국 사랑받기 위해 살아간다. 그것이 존경 및 동경이든, 성애든 기본적으로 모든 이들의 동인은 사랑이다. 능력에 대한 인정욕구나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구조차도 결국 그로써 다른 이들에게 애정, 사랑을 받고싶은 마음에서 비롯됨을 부정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그렇게 모든 이들의 동인이 되는 사랑을, 마치 여성들의 것은 다른 것마냥 혹은 사소한 것마냥 치부해버리고 멸시적으로 말하는 것이 문제지 과연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문제일까. 아니, 오히려 '여자들은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랑의 형태나 모양은 제 멋대로 재단해왔던 남성중심적 시각에 맞서 '이것이 진짜 우리가 하고 있는 사랑의 모양'이라 선언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사랑을 지키려 노력했던 헤라나, 아름다움으로 사랑의 권력을 누리기보다 외려 그로인해 수도없는 폭력에 시달려야했던 아프로디테, 사랑을 하고싶지만 사랑이 전부라 치부되는 게 싫었을 뿐인 아르테미스의 이야기는 그렇기에 중요하다. 남성들의 시각이 아닌, 여성들의 시각으로 말하는 사랑은 그래서 중요하다. 목소리를 내고 소리쳐야만이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중심 시각의 자리를 진짜 여성의 목소리로 채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사랑이 전부'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부재했던 여성들의 사랑이야기. 그 목소리를 내주는 헤아아가 소중한 이유다. 언젠가 여성의 사랑이야기를 보면서도 '역시 여자들이라 사랑이야기네'가 아니라, 단순히 한 인간의 이야기라 인식할 수 있는 날을, 여성 또한 본인의 욕망을 가진 주체로서 인식돼 '헤아아'가 더 이상 필요없는 날을 위해 더 많은 헤라와 아프로디테, 그리고 아르테미스들의 이야기를 듣고싶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과 함께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Review]  도서 작은 아씨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